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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02. 2019

낡은 것들은 특별하지 않다

#종로 창신동 봉제거리


낙산공원 길로 해서 동묘로 내려가려다, 공원 정상에 있는 <창신동> 도보코스 표지판을 본다.


생각지도 못한 스팟들이 적혀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 드라마 시크릿 가든 촬영지, 미생 촬영지, 백남준 기념관... 바로 옆 동네임에도 10년이 넘게 이곳을 둘러보지 않았다. 계획을 바꿔 이 코스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예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김광석 집'은 지도에는 없다. 구글링을 하니 주소가 나온다. 창신 5길 47. 표지판을 찍은 사진에 대략 위치를 추가하고 휴대폰을 닫는다. 여기까지 와서 휴대폰만 보면서 걷기는 아깝다.



특별한 골목은 아니다. 지방도시의 주택가에서 자라고, 서울에 와서 학교 앞 주택가에서 자취를 하고, 지금도 대학로의 주택가에서 사는 나에게, 이 동네 풍경은 신선함보다 익숙함에 가깝다. 필요에 의해 올라간 집들과 최소한의 기준으로 정비된 골목, 집집마다 늘어놓은 화분이며 낡은 철제 대문 같은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도 될 것들이다. 하지만 볕이 밝은 주말 정오였고, 사진기를 들고 어슬렁대는 나에게 호기심을 던지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곳이다.


<이동>보다 <정지>가 무난하고, <수집>보다 <응시>가 더 자연스럽다.

 


볕 아래 드러난 미싱 작업대는 비어있다.

점포의 이름도 보이지 않아, 어떤 용도로 사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몇 개 남은 작은 구조물에서 노동은 짐작되지 않는다. 잠시 밖에 둔 것인지 누군가 수거해 갈 것인지도 가늠되지 않는다. 폐기된 것이라고 하기에 작업대는 지나치게 깔끔했고, 다시 쓸 거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해 보인다. 이상하게 저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봉제 작업을 유심히 본 적이 없어서, 작업할 때의 손놀림을 기억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골목은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중간에 길쭉하게 지어진 집의 내부 구조가 궁금해진다. 건물의 좁은 꼭짓점에 뜬금없는 물건이 놓여 있을 것 같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골목의 한쪽은 아스팔트고 한쪽은 시멘트로 포장된 이유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1층과 2층에 있는 나무와 화분 들로 인해 풍경은 안정적이다.


가운데 있는 건물에 사는 사람은 크게 휘어지는 저 곡선을 매일 보며 살 것이다.



건물마다 자기만의 뷰포인트 하나씩은 갖고 있다.


 낡은 난간과 계단에서 위태로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좁은 골목을 나오니 넓은 도로가 만나는 활지(闊地)가 나온다.


노인복지관 등 큰 건물과 양옥 들이 빽빽하지 않게 들어서 있다. 그늘을 찾아가 앉을까 했는데 의자가 더러워서 그냥 계속 걷기로 한다. 휴대폰을 꺼내 아까 찍은 도보코스 지도를 보고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를 더듬더듬 찾아간다. 그림 지도는 전체적으로는 예쁘지만 세부적으로는 정확하지 않다. 하긴 그건 그래도 되는 물건이다.



영화의 어느 장면을 촬영한 곳인지 모르고 갔는데, 가자마자 장면이 떠오른다. 납득이가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굳이, 하면서 와 본 곳인데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건축학개론의 히로인은 수지보다 납득이가 아니었을까.



낡은 것들은 특별하지 않다.

낡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쓸모가 없어지지도 않고, 오래됐다는 이유로 특별한 아우리가 생기지도 않다. 덧칠된 페인트 혹은 층층이 쌓인 먼지가 눈에 먼저 들어올 뿐이다. 하지만 덕분에, 조심스럽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그건 큰 장점이다.



위가 트인 놀이터 안엔 빛이 가득하다. 빛이 가득하기에 그림자도 잔뜩이고, 그림자가 잔뜩이기에 선들이 화려하다. 아이들은 선을 넘으며 뛰어다니고 엄마는 선을 밟으며 산책한다. 아빠 하나는 놀이터 밖 풀밭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모두가 놀고 있으니 꽤 합목적적인 시설이다.



김광석이 대구에서 올라와 살던 집이다.

누군가의 생가나 흔적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보고 싶었다.


꽤 오랜 기간 내 정서를 의탁해 온 노래들이었다. 김광석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시간이 갔고,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또 다른 시간이 갔다. 스윽 걸어와서 건물 앞에 잠시 서 있는 것 정도는,


그래서 매우 괜찮은 일이다.


어느 게시글에서,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다른 사람이 살게 되면서, 김광석이 작업실로 쓰던 방은 없어졌다,라고 읽었지만 건물이라도 보고 싶었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 의심을 보내기도 하지만, 일상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할 때가 있다.  종종 이렇게 남의 일상을 스쳐 지나갈 때처럼.


수증기가 뿜어지고, 오토바이가 달리고, 재봉틀이 움직인다. 일요일이기에 더 적은 빈도수일 것이다. 가야 할 사람들은 늘 가고, 마무리할 일들은 늘 밀어닥친다. 어느 휴일 오후에 천천히 골목을 부유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휴일이 지나 이 골목을 벗어나면 늘 오르던 출근길에 오르고 일의 마무리를 위해 스스로를 닦달할 것이다. 움직이고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한 시기를 보낼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별다른 주저함 없이.



널린 정물들을 마저 지나면 창신동의 골목은 6차선 대로에서 끝이 난다. 잠시 멈추고 대로를 건너 동묘로 향한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조만간 다시 걸을 창신동 길은, 아마 다른 풍경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다시 바라보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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