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
5월 23일(월) 카트만두(Kathmandu)
기억할 것
-세상이란, 무시할 수도, 무서워할 수도 없는 샹차이(香菜) 같은 존재라는 것
잊어버릴 것
-넘치는 맥주를 재빨리 닦아내는 것
세상은 절망적으로 작아져. 나이가 들수록.
네팔의 카페에서 맥주를 앞에 두고 있는 너는 잘 모를 거야. 니가 이미 편입한 세상, 그리고 앞으로 편입할 세상 모두, 알아갈수록 별 볼일 없다는 걸. 오해는 하지 마. 여전히 세상은 무서워. 거대하기도 하고. 다만, 그걸 움직이는 것들(과 놈들)이 너무 뻔해서 절망스럽단 얘기야. 지금의 넌, 세상이 기억과 상상을 넘어선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겠지만, 지금의 난 정반대로 느껴. 세상은 기억의 용량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상상의 영역엔 들어가지도 못해. 비의(秘意)는 야반도주하듯 사라지고, 피상(皮相)만이 가득한 곳이지. 암울한 얘기야.
가끔은 놀라기도 해.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심한 말만 하며 웃음을 띨 때,
상황의 미개함을 인정해야 할 시점에 전례(前例)의 경건함을 꺼내들 때...
그렇게들, 세상의 평균율을 바보 같은 수준에 방치할 때.
이렇게 작아진 세상에선 편하게 마음을 누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지.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황금 키 같은 건 없다는 것도. 다만,
요령, 같은 게 도움이 돼
예컨대, 이런 사람들이 있어. 몇 분 안에 떠나는 열차를 향해 돌진하지 않는 사람들, 내일 쓸 보고서의 내용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터진 문제를 상의하려는 다급한 전화를 일부러 한 템포 늦게 받는 사람들, 그리고 넘치는 맥주를 황급히 처리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어려운 문제를 쉬운 문제로 치환시키곤 해. 마치 세상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표정으로 말이야. 이런 사람들을 무작정 따라 할 수는 없어. 그건 천성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쓰는 요령을 조금 참고할 수는 있을 거야. 눈 앞에 닥친 상황에 몰입되지 않는 자그마한 팁들 말이야.
어떤 사람은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하기 위해 상황이 조금 더 번지기를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이 상황으로 인해 벌어질 '최악의 결과'를 디폴트 값으로 세팅하기도 해. 어떤 사람은 달아나버린 평온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잠시 동안 눈을 감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 그대로 그냥 무감한 표정으로 응시하기도 하지. 어떤 경우건 그들은 상황에 휩쓸려가지 않는 요령을 알고 있어. 그런 것들을 하나씩 관찰해서 니 안의 아카이브에 쟁여뒀으면 해. 실제로 어떤 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바로바로 튀어나오진 않겠지만, 아무것도 잡을 게 없이 허우적댈 때 니 아카이브에 있는 몇 개의 이미지들을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을 거야. 아. OOO라면 이렇게 했겠네. OOO라면 이런 말을 하고 넘겼을 수도 있어. 하고 말이야. 우리의 일상에서는,
초인 같은 건 없다고 보면 돼.
있어도 만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하겠지.
그런 사람들을 기대하지 마. 그런 사람들에게 기대려고도 하지 말고. 그러나 초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주는 교훈 같은 것들은 꽤 많아. 이런 소소한 기준들을 하나하나 쌓아두면 돼. 니 머리로 판단해서 걸러낸 후에 말이야. 모두가 추구하는 것들이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의외로 많아. 남들 따라 하다가 시간 버리는 경우는 부지기수고. '중간이라도 가기' 위해 얼마나 쓸모없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아직 넌 모를 거야. 중간까지 갔을 때, 더 위의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열패감도 모르겠지. 있잖아. 너보다 조금 더 살아보니까, 그런 건, '피할 수 있는' 시행착오인 경우가 많아. 니가 스스로 납득할 만한 기준 없이,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는 마. 니가 지워진 세상은 너한테 필요 없어.
넘치는 맥주는, 억지로라도, 그냥 내버려 둬.
맥주가 테이블 아래로 흘러 바지를 적실지라도 말이야.
수첩에 넘치는 맥주를 닦지 않겠다는 다짐을 적은 후로도 넌(그리고 난), 여유를 훈련하지 못했어. 20대를 넘어 30대 내내 해야 할 것들은 늘 배려 없이 몰려들곤 했으니까. 억지로라도 노력을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어. 허세로 보이면 어때. 그렇게 노력해서, 여유를 취하려는 너의 행동이 조금 덜 어색해지면 그 허세는 너에게 꽤 큰 자유를 줄 수 있을 거야. 자, 다음 술자리부터 시도해 보는 걸로...
그럼...
P.S.
중국이랑 네팔을 여행하면서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너랑 니 친구가 매번 빼달라고 하던 샹차이(고수)를 이제는 선호하게 됐어. 사람은 변하는 게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