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싸
5월 7일 (토) 라싸(拉萨)
-8시 넘어 일어나 아침식사 후 PC방. 계속된 속도 지체. 좀 짜증을 냈다. 과자까지 비싸다고 구시렁대며.
-희박한 공기 때문에 헐떡이며 오른 포탈라 궁 (...) 숨은 중간중간 가쁘다. 몇 개의 황금 무덤 안엔 '재'만 남아 있다던가. 시끄러운 단체 관광객. 애초부터 宮에 대한 회의적 생각이 있었다. 아님 어쩌면 아침에의 짜증 때문일까?
포탈라 궁 안, 공사 중인 통로는 초라했다. 천상에의 염원이 묵은 향내처럼 은은하게 그득했을 이곳에, 관광객들은 생경함에 대한 흥분 섞인 동경만을 가지고 모인다. (...)
-혼자 있고 싶은 기분.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쓰는 게 귀찮았음. 방에 갔다가, 혼자, 비 내리는데 신발 젖어가며 걷기. 탕카(탱화) 구입은 실패. 돌다가 밥은 5元짜리 콰이 판(快饭).
한국음식 하는 티베트 식당 가서 음악. 책 보기. 신경 쓰이는 담배 연기. 창 한 잔. 사람들 우르르 와서 나 혼자 슬그머니 New Mandala rooftop restaurant으로 피신.
추운 바람. 맥주 한 병. 책은 여전히 조금씩. 설산. 사원. 밝은 거리. 하늘. 구름. 흰구름 바탕의 어두운 구름. 가끔은 혼자 노는 게 필요하다.
졸리다. 춥고. 눈에는 절경이 박히는데, 왜 한숨이 길까.
부러워. 너의 그 무감함이.
날짜를 보니 한국을 떠난 지 딱 두 달째인 날이네. 라싸로 넘어온 지 나흘 째고. 아마 지금 넌, 여행 중에도 혼자만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을 거야. 꽤 예민하게 말이지. 남들이 잘 안 가는 티베트 땅을 여행 중이지만, 넌 시간이 아깝다거나, 최대한 많은 걸 봐야 한다거나, 감상을 끌어올려야 한다거나, 하는 욕망은 전혀 없어. 두 달이 지나면서 여행은, 잠시나마, 일상이 됐을 거야. 말하자면, '여행객'보다는 '여행자'쪽에 가깝달까. 일상이 안온하다거나 안정적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일상은 사람의 오감을 평범하게 만들어준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 니가 살고 있는 '여행자로서의 일상'은 너의 오감을 평균으로 유지하게 해주고 있어. 너는 평범하게 지루해하고, 평범하게 짜증을 내고, 평범하게 무표정해지기도 해. 평소 학교 다닐 때 그랬듯, 그리고 지금 내가 회사를 다니며 그러하듯, 일상을 벗어난 뭔가를 찾지만 금세 싫증을 내기도 하지. 반복되는 식사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눈을 가득 채우는 이국적인 풍경과 귀를 떠나지 않는 이공의 음들은 스쳐 지나는 듯해. 그런 니가 부러워. 지금의 난.
언제가 돼야... 오래 떠날 수 있을까.
학생에서 취준생으로, 취준생에서 회사원으로 신상이 바뀌며, 얻게 되는 것과 잃게 되는 것들이 있지.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그리고 너로서는) 지금 누리는 것들보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동경에 약간 더 큰 무게추를 달아놓고 살아.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무게추를 달고 일상의 심연으로 가라앉아버린 게, 바로 장기 여행이야. 니가 하고 있는 저 여행 때처럼 세 달은 바라지도 않아. 딱 한 달만이라도 다른 곳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가 돼야, 그게 가능할까를 종종 생각해. 특히 휘몰아치는 일거리 앞에서 말이야. 휴가는, 앞뒤로 휴일을 붙여도 늘 짧아. 짧은 휴가를 어떻게 꽉꽉 채워서 보낼까를 고민하는 재미도 있긴 해. 하지만, 가득 채운 9일간의 휴가 동안 난 대개 '여행객'에 머물게 되더라. 론리플래닛의 깨알 같은 정보 같은 건 그다지 필요 없는, 굵직한 볼거리만 찾아다녀도 늘 시간에 허덕이는, 그런 여행객. 짧게 머물고 급하게 이동하는 여행이란, 쉼표 위에서 잰걸음을 걷는 느낌이야. 매우 탐탁지 않아.
너의 불평, 너의 심드렁은 그래서 부러워.
빠른 주기의 일상을 살다가, 짧은 여행을 겨우 떠났을 때, 난 약간의 새로운 경험에도 뛸 듯이 기뻐해. 약간만 새로운 공간에 가도 뿌듯해하고... 그리고는 있는 감상, 없는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놓지. exotic은 '일상의 피로를 풀어줘야만 하는 대단한 뭔가'로 승격했어. 슬픈 일이지.
남들은 잘 안 가는 곳, 지도에 없는 길에 대한 동경은 아직 가지고 있지만, 늘 현실과 타협하게 되지. 여기 죽을 때까지 다시 못 올 수도 있는데, OOO 정도는 봐놔야 하지 않을까. 조금만 동선을 조이면 OOO까지 볼 수 있지 않을까. 니가 볼 땐 참 애달플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야. 억지로, exotic에 대한 무감함, 을 가장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성은 없을 거야. 그럴 필요도 없을 테고... 그러니 지금 너,
여행자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불평 실컷 해.
같이 다니는 친구한테 더 삐치고, 여행 코스에 대한 의견이 다르면 좀 싸우고 말이야.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어제 같을 거 같은 지루함에 몸부림쳐보고, 다 귀찮으면 그냥 하루 종일 게스트하우스 방에서 노닥거리거나, 굳이 티베트 음식 찾아서 먹고 낭만적인 감상평 쓰지도 말고, 루프탑에서 감자튀김에 맥주나 빨며 보내. 밍밍해진 감상으로 충분히 투덜대는 니가 부러워. 오늘은 미숙한 너에게 충고를 하기보다는, 여유로운 너에게 기대고 싶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