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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07. 2020

치앙마이 올드타운 골목 산책

#외우지 않아도 되는 풍경들

차선은 도로에서나 찾으라는 말을 곱씹으며

최선을 다해 윤곽선을 포기했다


-'리만의 악어구두' 中, (이설빈 시집 [울타리의 노래] / 2019년 문학과 지성사)





엉망인 채로 일어나는 것. 


정신이 들고도 침대 끝에서 끝까지, 침대보를 흩트리면서 수십 번쯤 뒤척이는 것. 알몸으로 아무렇게나 누워서 뭘 먹을지 생각하는 것. 그게 여행지에서 아침을 맞는 방법이다.



숙소 앞 좁은 골목에서의 빠른 움직임들은 피사체일 뿐이다. 수십 년째 반복하는 출근과 등교가 여행지에선 남일이다. 오토바이가 편하게 지나가도록 최대한 자주, 길 옆으로 비껴 선다. 구획선 밖에서 본 풍경은 너그럽다. 휴가를 'full로 땡겨서' 떠나오길 잘했다.


굳이 치앙마이가 아니어도 비슷했겠지만, 굳이 치앙마이여서 시선의 너그러움은 더하다.



불안, 고민, 걱정, 의무, 계획 같은 단어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원색의 거리,를 걷는다.


올드타운의 낮은 스카이라인은 안정된 풍경에 안정감을 더한다. 물건을 팔아야 하는 상점의 외경에서도 과도한 욕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에세이에서 읽었듯, 여행을 온 사람의 '감정의 왜곡'이겠지만, 이른 아침 산책을 하는 나로서는, 욕심 없는 풍경이 마냥 즐겁다.

 


눈에 뜨이는 식당에 앉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어버버버, 말을 하자마자 태국어, 중국어, 영어 설명이 병기된 메뉴판이 앞에 놓인다. 딱히 문자를 해독할 마음은 없어서 사진을 보고 고른다. 어차피 어떤 메뉴든 처음 먹어보는 것이기에, 여행자의 '낯섬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기엔 충분하다.



김이 피어오르는 조리대에서 뚝딱 만들어진 국수가 테이블에 차례로 옮겨진다. 내가 시킨 국수를 보고, 아침부터 카레 국수냐,라고 웃는 친구 앞에, 아침부터 고기국수냐,라고 할 만한 그릇이 놓인다. 양적당하고 맛은 더 적당하다. 딱히 아침이어서 덜 자극스럽게 만들어주진 않았을 것이다. 수천수만 개의 그릇을 상대하면서 만들어진 평균에 맞게 만들었을 뿐이겠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내용물을 비운다.



필요(必要)가 켜켜이 쌓인 골목을 걷는다.


해진 것들과 빛바랜 것들에 더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취향이다. 세탁소 주인은 없었지만 훔치듯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얼른 고개를 돌린다. 돌린 눈 안에 여전히 색은 넉넉하게 담겨 있다. 첨언이 필요 없는 풍경들이, 걸음의 속도에 따라 스쳐간다. 낡은 영사기가 된 기분이다.



하루치의 과일들이 셰이크 집 매대에 놓여있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았거나, 직접 시장에서 사 왔을 것이다. 한 남자는 자신이 팔아야 할 하루치의 과일을 담고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그는 서두르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장딴지에, 하루치의 힘을 균등하게 나눠 가할 뿐이다. 스쳐 지나가는 나는 하루치의 시선을 불균등하게 나눠 그의 뒤를 쫓는다.



가짓수가 적은 색과 굴곡이 절제된 선으로 만 것들은 충분히 아름답다.


태국 사람들의 미적 감각은 요란하지 않다. 시선을 어지럽히지 않으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도드라지지 않게 써놓은 글자들 더 유심히 보게 되고, 튀지 않는 색 앞에서 더 오래 서성이게 된다. 치앙마이를 걸으면서, 같은 디자인의 대문이나 간판을 본 기억이 없다. (그건, 그곳에선 놀랍지 않았으나 다시 돌아온 서울에선 놀라운 일이다. 새삼.)



볕이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골목 곳곳 즐비한 녹색을 볼 때마다 깨닫는다. 겨울이어도, 낮에는 30도 가까이 올라가지만 습도가 적어 땀이 흐르진 않는다.


친구와 각자,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그가 본 풍경과 내가 본 풍경은 다르게 기록될 것이다. 하나의 음이 늘 다르게 해석되듯.



어제 피웠을 향은 재로 변했다. 하나의 물질에서 또 다른 물질로 변한 것이겠지만, 연기가 춤을 추는 동안 왠지 모르게 '비물질적인 무언가'가 천천히 흘러나왔을 것 같다.


작은 코끼리를 앞에 둔 누군가의 소원은, 우리가 평소에 바라던 소원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잠시 일상을 떠나온 나로서는 딱히 빌 것이 없어서, 코끼리의 안녕 따위슬쩍 빌고 만다. 이방인인 내 말을 알아들을 리는 만무하다.



세상을 외우듯 살아왔다, 는 문장을 적었었다.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행히, 이곳에 오니 외우지 않아도 되는 풍경들이 넘친다. 빈 택시가 멀리 사라지고, 빈 자전거가 얌전하게 서 있다. 낱말로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풍경들이다. 당연히, 내가 살아내야 할 일상이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 특권을 누리고자 난 굳이 여행, 이란 형식을 택한 것일 테고.



어느 상점, 작은 포렴(布簾)이 하늘을 점유하고 있다.


여행을 오면 길을 걷다 시선을 하늘로 향할 때가 많아진다. 신체의 모든 게 느려져서일 게다. 치앙마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걷고 오래 하늘을 봤다. 그럴 때 보이던 모든 것들, 사원의 첨탑, 나무의 잎사귀, 지붕의 끝 같은 것들이 하늘을 사이좋게 점유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욕심을 내서 하늘을 마냥 가리지 않았다. 역시나 여행자의 왜곡된 감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사진으로 담으니, 그 하늘을 나도 공유하게 된다.



골목 끄트머리의 시장을 통과해 큰길로 나간다. 네모 모양의 성곽 안, 치앙마이 올드타운의 호젓함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기참으로 치환된다. 몇 개의 단어만 말해도, 어디로든 데려다 줄 트럭 택시가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택시 옆에 서 있던 기사는 굳이 우리에게 다가와 묻지 않는다. 그는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디론가 갈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군가 묻지 않아도 목적지를 얘기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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