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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23. 2019

가을이라는 서정성, 덕수궁


입구의 번잡스러움은 평일 정오에도 마찬가지다. 들뜬 단체 관광객의 소란스러움을 뚫고 걷는다. 길에 낙엽이 가득이다. 낙엽을 담는 여행객들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모순된 풍경, 이라는 생각이 잠깐 든다. 유치원생들이 멀리서 낙엽을 공중에 던지고 웃어댄다. 부러운 풍경, 이라는 생각이 잠깐 든다. 


낙엽에 손을 대 본 지가 꽤 됐다. 


주변의 것들을 만지기보다는 바라보는 게 더 편하다. 그걸 굳이 나이, 라는 단어로 설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설치된 조형물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닌다. 빛을 잡아내기 위한 것인지, 빛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형물로 인해 가을빛에 조형이 더해진다. 별 말없이 조용히 땅으로 스며들려던 빛이 투명한 색들로 쪼개져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에 따라 빛의 모양이 흔들린다. 


조용하고 풍족한 풍경이다. 한복을 차려입은 한 명이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를 든 한 명이 뷰파인더를 보기 시작한다.



광해군이 즉위식을 했다는 조그만 건물을 지나 단풍이 한창인 뒤편으로 간다. 미술관 건물 옆의 한그루를 먼저 지난다. 축대 위에서 아치를 그리고 있는 나무다. 


짙은 붉은색은 선명하고 투명하다. 


모순된 표현, 이라는 생각이 잠깐 든다. 빛을 받기 위해 뻗어대던 잎들이, 적어진 빛을 나눠갖으며 다 같이 붉어졌다. 겨울이 지나면 많아진 빛을 나눠가질 것이다.



땅에 떨어진 단풍잎들은 불투명한 색을 띤다. 수분을 뺏긴 것들 특유의 무뚝뚝함이 보인다. 가을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기에 눈에 담는다.

 


후원, 이라 명명된 산책길은 짧고 아늑하다. 


몇 명의 중년 여성들이 이미 소녀가 돼 있다. 그들이 찍는 사진에 단풍의 색이 고스란히 담겼으면 좋겠다.



풍경에 여러 색이 공존한다. 


다른 계절보다 이 시기에 색의 종류가 더 다양할 것이다. 푸른 잎의 나무 뒤에 붉은 잎의 나무가, 붉은 잎의 나무 옆에 노란 잎의 나무가 겹겹이다. 사진을 빽빽이 채우는 빛들로 괜히 뿌듯하다.

 


자주 멈추며 사진을 찍는다. 혼자 혹은 둘씩 걷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덕분에 가을의 속도는 늦어진다. 빛이 더 적어지는 겨울이 오면 속도는 다시 빨라질 것이다. 풍경도 사람도, 빛도 바람도. 


산책로의 끝에서 다시 뒤돌아 한번 더 걷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간다. 가방을 맡기고 천천히 유영한다. 광장, 이라는 테마의 전시다. 일제시대, 독립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이 대부분이다. 굴곡 없이 쫙 펴서 벽에 건 병풍들이 인상적이다. 광막한 시대가 내처 방 안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일부러 강한 색과 선명한 선을 그려 넣은 듯하다. 


저 병풍들이 놓인 방 안에서 오간 밀담들 역시 뚜렷했을 것이다.



일제시대 소설과 시집들을 전시해놓은 공간을 지나간다. 원본과 더불어 복제본도 같이 놓여있다. '읽어보세요'라는 친절한 설명이 쓰여있다. 몇 장 읽어보려했으나, 한자가 너무 많아서 도로 내려놓고 혼자 부끄럽게 웃는다. 


전시관 벽 한쪽에 인물화가 여러 점 걸려있다. 변월룡의 그림을 빼고는 모두 자화상이다.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던 화가들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속도로 그림을 그렸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내 얼굴을 그렇게 오래 바라본 경험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 누군가에게 대신 부탁할 것이다. 내 얼굴을 오래 바라봐달라고. 그리고 아마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관을 나와 벤치에 앉아 몇 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몇 개의 메시지를 보낸다. 눈 앞에 보이는 가을 풍경과는 별개의 일이다. 물을 뺀 분수대의 바닥에 가을이 차오르는 오후다. 기념할 것이 없는 직장인들이 짝을 지어 산책하고, 기념을 하고 싶은 외국인들이 두툼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유치원생들이 헤짚던 낙엽들은 이제 가만히 땅에 놓여있다. 


바람을 타지 않는 가을빛이 가득하다. 평화로운 오후가 적당한 속도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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