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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29. 2019

서로 침범하는 건, 서로 친한 것들뿐이다

#마른 포도나무 그늘에서



마른 포도 아래 한참, 앉아 있었다.

한참은 지나고 보니 십여 분 정도였다. 낮은 키의 나무는 잎까지 늘어뜨려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야 했기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카파도키아의 파란 하늘 아래였다. 식당의 누군가가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어놓았을 나무였고, 그런 이유로, 일행과 동떨어진 한 그루였다. 첫 열매를 매달았을 때 가지의 장력은 위태로웠을 테지만, 지금은 가지마다 거친 힘줄이 가득이었다.



처음에 나무를 올려다봤을 때 포도송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햇볕에 말라 갈색으로 변한 포도송이는 크기가 작아져서 녹색을 넘보기에 무리였다. 하지만 긴 시간을 지킨 자리에 있는 포도송이는 편안해 보였다. 포도알은 색이 순해지면서 원형을 잃었을 것이다. 모양이 이지러질 때, 빛 먼지는 주름마다 스며든다. 그렇게 하늘이 착색된다.


나무는, 경작과 소출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그래서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처지임이 싫지 않았을 것이다.



빛을 내놓은 태양은 나무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나무는 태양을 빛이라는 기억으로 통과시켰을 것이다. 땅 위에 새겨진 순한 그림자가 그 증거다. 볕은 층으로 쌓인 포도 잎사귀와 열매 들을 침범해 땅에 닿았고, 포도나무의 것들은 볕을 여과함으로써 볕의 완전성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서로 침범한 것들은, 서로 침범할 만큼 친한 것들이다.

나무에 걸러지지 못한 볕은, 그 표백 성으로 인해 땅에서 거부될 것이었고, 볕의 일방성을 받아내지 못하는 나무는, 그 알량함으로 인해 녹색을 꾀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늘에서 온 것과 땅에 있는 것은 서로를 침범하며 서로의 영역을 확인하고, 서로의 영역에서 안온하다. 그리고,



안온한 것들은, 쉬이 예리함을 거둔다.

한낮, 10여 분 동안 본 풍경은 수더분했다. 원래 어디 하나 거칠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 포도나무 한 그루로 인해 더 나긋해졌다.  볕과 나무 모두가 주변을 아우르는 풍경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지만 아쉬운 건 없었다. 풍경 사이에 바람이 떠다녔다. 식사를 마친 일행이 하나 둘 큰 나무의 그늘 아래에 모여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 풍경을 즐기며 앉아 있는 내 시선도 덩달아 뭉툭해졌다.



언젠가, 열매를 마르게 한 볕이 줄기의 마디에 쌓이면, 포도송이는 마음에 드는 바람을 골라 떨어질 것이다.



버스가 시동을 걸자, 일행이 하나둘 올랐다.

터키의 하늘은 여전히 이음새 없이 이어질 것이지만, 풍경은 곧 흙색을 벗고 녹색을 덧입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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