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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26. 2019

단정한 바다의 뒤편

#양양 남애 해변 산책



평일 오후 3시, 양양 남애 해변.
구름이 세를 불리고 있다.


뜻밖의 바다. 전날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던진 얘기로 인해 서울에서 3시간을 달려왔다. 먼저 온 일행들은 바다에 들어가 있다. 좋은 파도,라고 하지만 나는 까막눈이다. 단지 파고만으로 파도의 질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도가 좋은지는 서핑 보드에 타 있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바다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나는 굳이 파도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3시간 전에 있던 사무실과 다른 풍경에는 매우 흡족하다. 그 풍경뒤편으로 산책 길을 잡는다.



녹슨 망루엔 사람이 없다.

 '철'이 지나면 많은 요소가 생략된다.

쓸데없이, "요즘 내 삶에서 생략할 게 뭐 없나" 같은 고민은 떠올리지 않는다

쓸데없이, "예전에 내 삶에서 세워뒀던 망루를 철거해버릴까" 같은 고민도.

망루를 지나쳐 해변 오른쪽으로 걷는다.



파도에 닿아있는 모래를 얼마나 파내려가면 마른땅이 나올지 문득 궁금해진다.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엔 배운 적이 없는 듯하다. 분명 누군가는 파봤을 텐데. 파도 포말의 거품이 얼마나 있다가 터지는지도 궁금해졌지만 굳이 더 궁금해하지는 않기로 한다.


시원시원한 모양과는 달리, 파도의 소리는 요란하지 않다.



액션 카메라를 바다 가까운 해변에 묻어둔다. 방파제 넘어 전망대까지 갖다 올 시간 동안 조용히 제 할 일을 할 것이다. 앵글이 정확한 수평이 아니고 바람에 흔들리기도 할 테지만 괜찮다. 내가 보지 않는 사이의 풍경을 담아만 낸다면 만족한다.



방파제에 나무 데크를 설치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방파제 쪽으로 들어갈 의지는 굳이 생기지 않는다. 인부들 사이에 유창한 중국어가 오간다. 먼 풍경에, 분무기를 뿌린 듯한 물보라가 보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는 유창한 바람이 오가는 중이다.


어떤 부식도 자연스러운, 바닷가의 트럭.

태풍 속에서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래밭만 있는 해수욕장 쪽과는 달리 방파제의 오른쪽엔 바위가 그득이다. 바위마다 파도가 덮친다. 파도는 부서져야만 바위를 올라탈 수 있다. 하지만 잠시다. 작은 물방울들은, 뒤이어 온 파도가 담아가 버린다.


하지만 그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는 건 즐겁다. 주말의 고궁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기분이다. 오고 가고, 머물고 움직이는. 뭔가를 남기고 가는 듯하지만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없는.



갈매기는 쓸데없이 진지하다. 비행궤적을 보고 있으면 딱히 먹이를 구하거나, 구애를 하는 것 같진 않다. 생존과는 별개로 보이는 비행 같은데 이상하게 진지하게 임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날 때마다 긴장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가까이서 보는 갈매기는 새삼,


크고 진지하고 인간적인 새,라고 멋대로 정의해버린다.  


단정한 바다의 뒤편을 돌아나와, 단정한 건물의 뒤편을 지난다.


조그만 식당들이 모여있는 2층짜리 건물이다. 건물은 별다른 꾸밈없이 기능에 충실한 구조다. 초등학생이 자를 대고 죽죽 그은 것 같이, 직선들이 간결하다. 에어컨 실외기도 음료수 박스도 다 직선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역시나 직선으로 난 진입로를 따라, 전망대에 오른다.



원경의 바다에선, 바위 부분만 하얗다. 해안가의 바위는 침식된다, 고 배웠지만, 침식 중이다, 가 더 옳은 표현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건 바위와 파도의 일이다. 우리는 잠시 둘러보고 갈 뿐이다. 무정형하게 움직이는 하얀 선들을 감상한다. 전망대에 먼저 올라왔던 중년 부부가 꼳 내려가버렸기에, 혼자서 오래 감상한다.


평일 오후, 는 매우 좋은 시간이다.  



바다가 끝나는 지점에 관광객을 위한 구조물이 있다. 이쪽의 바다는 순한가 보다. 파도를 부수어 위력을 약화시키는 테트라포드는 다른 쪽에 있다.


바다의 것이 인간 쪽으로 넘어오는 걸 막기 위해 펜스를 친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잠시 헷갈린다. 인간이 바다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한 거라고 바로 결론을 낸다. 인간의 집단은 인간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인간의 '보호종'이다.


그물을 널어놓은 구조물을 지난다.

그물도 말라야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바다가 영업을 끝낼 시간이다.


보드를 챙긴 서퍼들이 하나 둘 바다를 떠난다. 나도 산책을 마친다. 원래 있는 곳으로 천천히 되돌아가, 일행들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린다. 그 사이 주위는 파랗게 변한다. 가로등이 켜지고 나무의 그림자가 해변에 내려앉는다. 정시보다 조금 일찍 출근한 회사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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