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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19. 2019

우리가 지나쳤던 터키

#버스 뒷자리에서 본 터키 풍경

(...)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카페가 불쑥 어둠 속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아니, 내동댕이쳐진 게 아니다. 어둠 속으로 부드럽게 들어간 것 같다. 극적인 요소 같은 건 전혀 없이. 당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에세이 '신을 찾아 떠난 여행' 중, 에릭 와이너 (2013년, 웅진지식하우스)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콘야(Konya)로 이동 중 / 정오


여행 내내, 버스의 맨 뒷자리, 오른쪽 창가가 내 자리였다.

패키지 가이드 말로는 덜컹거림이 심해서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꽤 쾌적했다. 종종 햇볕이 오른쪽에서 내리쬘 때, 커튼을 바로 앞자리에 많이 양보해서 따가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기도 했지만, 그곳이 나에겐 가장 아늑한 장소였다.


버스는 가장 위화감 없는 방식으로 풍경으로 들어간다. 두 지역의 풍경은 단절될 수 있지만, 달리는 차 밖의 풍경은 끊어질 수 없다. 미세한 차이만이 서서히 가미될 뿐이다. 그렇게 여행객도 당황하지 않고 터키의 풍경에 스며들 수 있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콘야(Konya)로 이동 중 / 오후


그곳에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또 하나의 터키'가 있었다.

버스가 멈췄을 때 둘러보는 유적지나 관광지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었다. 친절한 설명과 동선, 잘 정비된 볼거리가 <창 밖의 터키>에는 없었다. 어디에나 그득그득 넘치던 관광객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자질구레한 움직임도 없었다. 창 밖에는, 생활감(生活感)이 배제된 죽은 풍경 대신 매일매일 사람들의 관리를 받는 땅이 지나갔고, 그 땅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밭을 지나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이 지나면 산맥이 나왔다. 지역에 따라 풍경의 밀도는 다양했고, 시간에 따라 사람들의 걸음속도가 다양했다.


콘야 시내 풍경 / 아침


매일, 버스의 뒷좌석에 몸을 착지했을 때 여행이 시작된다.


차내(車內)에서 창밖으로 모든 시선이 허용된다. 엄밀히 말하면, 안에서 밖을 보는 것 외에 할 일이라곤 없다. 종종 차 앞에 서서 설명 중이던 가이드의 얼굴이나 앞좌석의 일행 얼굴을 쳐다보곤 했지만, 내내 창밖을 보는 게 일이다.


한국보다 6시간이 느린 터키에서, 여행 내내 새벽 4~5시에 일어났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정이 시작됐을 때 졸리다거나 멍한 느낌은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무표정하게 풍경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파묵칼레가 있던 데니즐리(Denizli)에서 에페스(Efes)로 이동 중 / 아침


관광객들의 아침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아침은 물리적으로만 같다. 기대에 들뜰 필요도 새로운 것에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보내는 아침은 길어 보인다. 마치 불편함을 참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같은 풍경이었다.


콘야(Konya)에서 안탈리아(Antalya)로 이동 중 / 오전


새로운 자미(모스크)가 올라간다. 회당이 완성되면 탑이 설 것이다.


동네 주민들이 돈을 모아 세울 경우 탑은 한 개가 선다고 했다. 부유하고 신실한 누군가의 기부가 있으면 두 개가 선다고 했다. 국가의 지정 혹은 지원이 있으면 네 개가 선다고 했다. 길가에 들어서는 새로운 모스크 주위에 몇 개의 탑이 설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몇 개의 탑이 서건 첨탑 끝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기도소리는 같을 것이다. 문득, 길 건너 옆집 사람들은 이 공사가 끝나길 원할지 계속되길 원할지 궁금해진다.


타우루스 산맥 / 정오

타우루스 산맥을 넘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유명한 백향목이 지천이다.


밀도가 높은 '수목의 왕'이라 선박 건조에 사용했다는 설명과 함께, 이곳의 나무 5000그루를 잘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했다는 안토니우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그 나무를 자르고 옮기며 투덜대면서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커플에게 쌍욕을 했을 인부들을 상상한다. 그들에게 백향목의 높은 밀도는 노동의 고된 강도였을 뿐이겠다.


돌산의 나무들이 바위 사이에 있는 몇 줌의 흙에, 필사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풍경을 그들도 봤을 테지만, 별다른 감흥은 갖지 않았을 것이다.


아스펜도스(Aspendos) 근처 / 오후


옆 차선과의 거리는 1m가 되지 않는다. 원래 커다란 것들이 더 커다랗게 보이는 거리다. 버스와 트럭의 속도가 일치하지 않아 한쪽이 앞서 나간다. 그럴 때, 한쪽은 다른 한쪽에게 명암과 굴곡으로만 존재하는 풍경이 된다. 두 차량의 속도 차이가 적을수록, 감상할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 봐야 잠깐이지만, 잠깐이어서 차이는 크다.
아스펜도스(Aspendos) 근처 / 오후


높게 자란 풀이 마치 방풍림처럼 시야를 막는다. 별다른 소용처 없이 뭔가를 심어 두진 않았을 테니, 저 풀 또한 언젠가 수확될 것이다. 풀이 끝나는 지점에 목화밭이 펼쳐진다. 줌을 최대한 당겨도 목화는 점으로만 보인다. 군데군데 목화를 따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상하게 그들이 목화보다 더 작은 점으로 보인다.


수확된 목화의 이동 경로 같은 건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안탈리아(Antalya)에서 데니즐리(Denizli)로 이동 중 / 오전


나무 한 그루를 들판에 내어놓는 친절함에 대하여.

잘 이겨진 밭 한가운데 있는 나무는, 눈에 띠지 않는 탈주 욕망 같기도 하고, 정착지를 거부한 망루 같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겁이 많은데도 없는 척 딴 데를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 같기도 하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무들은 각자 존재한다.


땅의 사람들은 명쾌한 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에페소스 (Ephesus) 외곽 / 아침


버스 정류장에 3대로 보이는 세 명이 앉아 있다. 그들의 시선은, 세 명의 나이만큼 제각각이다. 버스가 오는 쪽을 보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게도 여유가 있는 아침이어서일 것이다. 아이의 시선 끝이 뭐가 있었는지 보고 싶었지만 이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내리는 사이에 내가 탄 차는 꽤 멀리 이동해버렸다.


이즈미르(Izmir) 시내 / 오후

고대 유적인 에페수스에서 출발해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니, 대도시가 창밖에 펼쳐진다. 우리나라 부산에 해당한다는 이즈미르다. 듣고 있던 음악 장르가 갑자기 바뀐 느낌이다.


집들이 끝나는 자리에 에게해가 펼쳐진다.

연안에 들어서 있는 빽빽한 집들을 볼 때면 종종, 맨 앞에 서 있는 구경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라는 원형경기장의 맨 앞 줄에 앉아 고개를 죽 빼고, 이국에서 오는 것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스탄불 시내 / 오후


이스탄불은 버려진 시간들의 보관소 같다. 다른 도시에서 애초에 사라졌을 시대들이 켜켜이 축적된 느낌이다. 인간의 시간은 늘 이동 중이라는 걸 긍정하는 듯이. 이곳의 사람들은 그들이 쌓아둔 것을 방치하고 않고 보수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곳의 유적지들은 높이 올라간 것일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이스탄불에선 애써 과거의 감성을 밀수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하늘 아래 드러나있고, 바다 옆에서 흘러간다. 난 버려진 시간의 무덤 같은 걸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신이 버린 플라스틱의 종착지를 고민하는 환경 운동가처럼,


내가 버린 시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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