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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11. 2020

특정되지 않는, 일요일 오전, 미용실

#차곡차곡 쌓이는 노화에 대하여

미용실답게, 대화는 머리 얘기로 시작됐다.


-자른 지가... 꽤 돼셨네요? 12월이요

-네, 중간에 태국 여행 가서 한 번 잘랐습니다.


일요일이었고, 오전이었다. 다른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미용 보조사는 천천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늘 보이던 샴고양이와 12월에 한 번 봤던 붙임성 있던 새끼 고양이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두 고양이의 부재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관뒀다.


-거기 길거리에서 자르신 거예요?

-아니요. 샵에 가서요

-하긴, 요새 베트남이나 태국 샵 좋아져서 한국하고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네


급하지 않게, 기계가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미용사는 늘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시작해서 뒷머리를 지나 왼쪽 관자놀이에서 끝난다. 아래에서 위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기계를 반복해서 움직이며 내 머리 뒤로 반원을 그린다. 기계의 소음은 낮고 일정하다.



-며칠 갔다 오셨어요?

-10일 정도요.

-아~ 가족들하고 같이?

-아니요, 친구랑 회사 선배랑요

-우와, 다들 집에서 허락해줬어요? 대단하네요.

-아. 네..


기계적으로 대답을 하고 나서, 말을 더 보탤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게...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허락받을 사람이 굳이 없어요.'라든가,

'저랑 친구는 미혼이라 자유롭고, 같이 간 선배도 꽤 탄력적인 결혼생활을 하는지라...' 같은.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화가 싫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일요일 오전이었고, 고양이들은 없어도 충분히 평화로운 샵이었으니까. 대화는 미용사가 알아서 이었다.


-전 말이요. 결혼 한 달 전쯤인가? 친구들하고 태국을 간다고 얘기했었거든요. 그랬더니 와이프가, 결혼하면 절대 안 되니까 지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녀와 하면서 허락해줬었어요

-다행이네요.


1년 넘게 봐 온 미용사는 나이를 높게 봐야 20대 후반이라고 생각했었기에, 결혼을 했다는 말이 살짝 의외였다. 하지만, '결혼'과 '와이프'가 들어간 문장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사는 일상의 디테일을 알지 못하더라도, 느낌은 어떻게든 전달되게 마련이다. 간간이 이어지는 대화 사이,


미용사가 날 당연하게,
유부남으로 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일요일 오전, 잠옷보다 조금 나은 옷을 입고 미용실을 찾는 남자라서?'

'머리를 자를 때마다 별다른 요구 없이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

'머리 깎는 내내, 눈을 감고 있거나, 거울 아래 조그만 LCD 화면만 멍하니 바라봐서?'


떠오른 몇 가지 답은 마땅하지 않았고, 모든 답을 조합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달리 생각할 것도 없어서 던진 질문이어서, 나 스스로 이내 흥미를 잃고 눈을 감았다.



-다 됐습니다. 길이 괜찮으세요?

-네


하지만 추측으로 찾지 못하던 답은 바로 아래에 있었다. 미용 보조사가 가운을 정리해 줄 때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미용사가 날 유부남이라고 판단한 게 이해가 됐다. 잘린 머리카락 뭉치에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았다. 거울을 보면서 새치가 많아졌네, 라는 생각은 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눈에 보는 건 다른 느낌이었다.


'통상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나를 충분히 유부남으로 볼 만한 증거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나이라는 숫자로 노화의 유무를 판단하는 습관을 오류라고 지적하곤 했었는데, 정작 내 몸은 정직하게 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곡차곡,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흰색으로 탈색시키면서.



시간의 흐름이 나라는 개인을 특정할 수 없고,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시간의 흐름을 특정할 수 없다.

그건 매우 정상적이고 단순한 사실이다. 마치 전 세계의 모든 일요일 오전에, 별다른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미용실에 고양이가 없던 건 아쉬웠지만, 만족스러운 대화였다는 생각을 하며 미용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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