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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r 20. 2020

타고난 구경꾼 기질

승객들은 서로 아는 얘기들을 교환하고, 노름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다음에는 속이 텅 빈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움직일 때는 사람이 아니라 텅 빈 바지, 텅 빈 블라우스가 움직이는 듯했다.


-소설 '돌의 정원' 中, 니코스 카잔차키스





멍하니 쳐다보는 걸 즐긴다.

관찰, 이라 부를 만한 건 아니다. 감상을 얹거나, 기억을 추가하기 위한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점 혹은 좋은 점을 찾기 위한 목적은 더더욱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내가 아닌 누군가를, 내가 지니지 않은 무언가를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러지만, 일에 쫓기거나, 사람에 치일 때도 마찬가지다. 잠시 멈춰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보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몇 분간 입과 귀를 닫고 눈만 열어놓고 있기도 하다.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술집 벽의 키치스러운 인테리어나, 특정 부위만 구겨진 아르바이트생의 유니폼을 눈으로 좇는다.



생각을 되짚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누군가의 이목을 끌기보다는, 누군가의 이면에 서 있길 즐겨했다. 말을 풍성하게 지어내면서 분위기를 이끌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을 쳐다보는 게 편했다. 근경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원경의 풍경으로 남는 게 자연스러웠다. 세상엔, 구경을 원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많았고, 나는 그저 그들이 원하는 시선과 미소를 내어주면 됐다. 내가 주도적으로 얘기를 하고, '쳐다봄을 당해야' 하는 경우가 어쩔 수 없이 있긴 했다. 그럴 때 내 말은 어색했다. 어떻게 몇 번의 공식적인 면접을 거쳐서 살아왔는지 신기할 정도다.


요즘엔 맡은 일이 다소 한가한 관계로,
나를 구경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무실이나 집에서, 멍하니 스스로를 쳐다본다. 나에 대한 정보를 갈무리하겠다는 특별한 의도가 있지는 않았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내 모습에 대해서 알게 됐다. 뭘 먹을 때 허겁지겁 대는 습관이 있고, 책을 읽을 때 한 권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떠들어보는 산만함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집에 하루 종일 있을 때 부엌에서 거실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수십 번 서성대거나, 집의 어디에든 몇십 초씩 가만히 서 있는다는 것도 알았다. 하루하루 늘던 뱃살이 이제는 흉할 정도가 됐다거나, 허벅지의 근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 와중에 근래 몇 번의 술자리에서 알게 된, 부끄러운 모습이 하나 있다.


 

내가 생각보다 불평이 많다는 사실과, 불평을 얘기할 때 생각보다 공격적이라는 사실이다.


취기 탓을 하고 싶으나, 그렇게 말을 돌리기엔 내가 쏟아낸 불평의 말들이 너무 다양했다. 누군가들에 대해, 누군가들의 어떠한 방식들에 대해, 그 방식들의 필연적인 결과물들에 대해 평소에 쌓아뒀던 불평들을 쏟아냈다. 굳이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나의 불평은 어찌 보면,
 타고난 구경꾼 기질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내 불만은 '불확실함'에 대한 것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시스템의 불확실함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누군가와 그들의 스타일이 야기하는 피곤함에 대한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눈만 뻐끔대면서 그런 모습들을 바라봤다. 불확실하다는 건, 반대로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책임지기보다는, 백업 요원처럼 서서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에 입사하고 십여 년이 넘는 지금까지, 구경을 즐기는 나의 성향은 일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다.


멍하니 보다 보면, 일과 사람들의 동선이 잘 보였다. 일의 종류와 성격을 분류하고, 제각기 다른 사람들의 속도와 성향을 읽었다. 구경으로 얻은 데이터들은 차곡차곡 머리에 쌓였고, 내가 일과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발전됐다. (고 믿는다.) 반성문을 쓰자는 건 아니지만,


이제, 구경꾼 기질을 조금은 줄여야 할 듯하다.

상황은 멀찍이서 파악하더라도 입장은 분명히 하고, 불합리한 점은 말하되 변변한 아이디어 몇 개는 같이 던지는 게, 도움이 되지 싶다. 어차피 풍경 안에 계속 머무르려면, 멀리서 구경할 때도 있고 가까이서 쪼그려 앉아서 바라볼 때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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