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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18. 2020

이토록 친절한 외계인이 될 수 있다면

[ 케이 팩스 (K-PAX) ]  2001년

습지는 사람을 가두지 않았으나 낙인이 찍힌 성스러운 땅답게 공간의 비밀을 지켜주었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 (델리아 오언스)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시시하게 시작한다. 주인공 '프랏'이 붐비는 기차역에 나타나고 경찰의 오해 때문에 소매치기범으로 체포된다. 순순히 경찰을 따라간 그는 정신이상자로 분류되어 전문병원으로 오게 된다. 의사 마크에게 프랏은 순순히 자신이 라이나 좌의 케이 팩스(K-PAX)라는 행성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는 반항하지도 도망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게 등장하는 외계인은 본 적이 없다.

이후 줄거리는 이렇다.


-'자칭 외계인' 프랏과 정신과 의사 마크는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마크는 프랏의 말이 단순한 정신착란이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프랏이 자신의 고향이라 주장하는 행성에 대해, 천문학자인 처남에게 자문한다.

-저명한 천문학자들 앞에서, 누구도 풀지 못한 행성의 궤도에 대해 설명하는 프랏을 보면서, 마크의 확신(프랏의 주장이 어쩌면 진실일 수 있다는)이 더욱 커진다.

-마크는 최면 기법 중, 로버트라는 남자가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인을 죽이고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과 프랏이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을 추적하게 된다.

-마크는 정신적 충격을 받은 로버트가 기억을 지우고 프랏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프랏은 대답하지 않는다.  

-외계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그 날, 프랏은 병원의 침대 밑에서 의식불명으로 발견되고 병원의 또 다른 환자 한 명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시시하게 등장한 이후 프랏은, 시종일관 친절하다.

코웃음 치며 자신을 정신병자로 여기는 의사 마크의 질문에, 그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대답한다. 자신이 외계 행성에서 왔고, 지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으며, 얼마 뒤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날짜와 시간까지 알려준다. 그는 자신의 '정신병적 배경'을 캐내려는 마크에게 자신이 살던 행성의 모습까지 묘사하며 반복적으로 대답한다.


프랏의 친절함은 방어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지도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마치 예전부터 이런 '무지'에 익숙하다는 듯이, 마크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 마크와의 상담 외의 시간에도 그는 병원의 의사, 간호사, 환자 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다정하게 인사한다. 말하자면 그는,


본인이 외계(外界) 그 자체라는 걸 알고 있고,
자신을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정신병원이라는 장소는 '나와는 다른 존재', 외계인(外界人)이라는 주제를 말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이다.


모든 환자는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각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의료진 역시, 그들이 속한 정상적인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외계일 수 있다는 점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환자들은 스스로 외계인인 동시에, 외계인을 관찰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은 담백하게 프랏을 자신과 같은 '정상적인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프랏을 의심하지 않고 수용한다. 주인공인 의사 마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프랏을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마크는 연민과 직업적 의무감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랏을 쉽게 배제해버리지 않는다.  



과거에 프랏은 새의 몸을 빌려서 지구에 머물렀었고, 지금은 사람의 몸속에서 지낸다고 영화는 암시한다. 새였건 사람이었건 그는 환영받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로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외계 생명체를 다룬 여타 영화와 다른 점은 바로 그가 지구인들에게 응답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을 향한 배타적인 시선에 맞서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대신 숨김없이 말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린다. 이것은 그가 지구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업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과도하게 지구라는 낯선 곳을 배척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가 수용 가능한 정도에서 지구인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를 한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지구라는 외계(外界)에 머무르면서도,
낯섬보다 호기심을 유지한다.


우리는 늘 외계인(外界人)을 만난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보통 이런 경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센서들(통념, 상식, 첫인상, 대화)을 총동원해서 낯선 존재에게서, 우리의 예단과 딱 맞는 대답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래야 속이 풀리고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우리의 수용 가능성에서 벗어난다는 판단이 들면, 우리는 쉽게 친절함을 거두어 버린다. 그 후에 우리 스스로가 내보이는 것은, 놀라운 배타성이다. 우리는 '우리 밖'을 경계하고 배제한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배타성을, '가족'이라는 관념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보여주려 한다. 영화 속에서 지구인들은 내내 가족의 소중함을 말한다. 그들에게 가족은 낯선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경계이다. 하지만 섹스, 결혼,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는 행성에서 온 프랏에게 이는 무의미한 강변이다. (물론 그는 반박하지는 않는다)



프랏은 어떠한 경계로써, 자신과 외부 세계를 선명하게 나누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성과 지구를 나누려 하지 않고 자신과 지구인을 가르지 않는다. 자신의 지식과 지구인의 지식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다름을 우월함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친절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먼 행성과 이곳 지구를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간으로 잇고 있다.


이토록 친절한 외계인이 될 수 있다면,
세계는 언제나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내 밖의 있는 것들을 별다른 동요 없이 관찰하고 특별한 편견 없이 기록한다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집단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불분명한 선을 선명하다고 강변하면서 서로에 대해 독한 말을 퍼붓는 대신에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 정도에서 이미 세계는 확장된 것이다. 나와 다른 것,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는 추후에 생각하면 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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