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Mar 27. 2020

내가 너의 싼티가 되어줄게

#처진 어깨 대처법


처진 어깨엔 묘한 비장미가 있다.

그건, 하루치의 에너지를 소진한 사람의 뿌듯함인 동시에, 더 이상 닦달하면 폭발하겠다는 조용한 경고이다. 느린 걸음으로 술집에 들어선 이 어깨엔 일종의 센서가 달려있다. 어설픈 위로나 논리적인 설명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민감한 센서가. 술자리에서 마주한 처진 어깨를 대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끄덕여주는 것.


지친 사람의 얘기는 의외로 흥미진진할 때가 많다. 얘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빌런 덕분에,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하루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빌런의 멍청한 짓거리들 덕분에.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기계처럼 긍정하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실례다. 진심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어깨를 처지게 한 '놈들'과 '것들'에 대해서 나의 일처럼 얘기하는 게 가장 좋다. (당연히, 흥미진진한 얘기 후에는 그런 반응이 격하게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어찌 보면, 일반적인 얘기다. 같이 회사 생활하는 동료, 혹은 마음이 맞는 친구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요즘 난 한 가지를 더 하고 있다. 바로,



내가 그 사람의 싼티가 되는 것.

일이라는 게 모두가 100% 만족할 수가 없기에, 누군가는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된다. 특히, 일에 부렸던 의욕이 갑절의 좌절감으로 돌아올 때면 부글거리는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게 너무 속상하다. 하지만, 권력관계 혹은 서로에 대한 배려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젠틀할 수밖에 없다. 공식적인 언어와 언제든 수정 가능한 문장으로 대화를 하면서......


그럴 때, 싼티가 도움이 된다.


어깨를 처지게 만든 빌런들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뒷담화를 하고, 뱃살 걱정 접어두고 안주와 술을 주접떨면서 먹어치우고, 무거운 얘기 도중에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늘어놓는 것. 했던 말 열 번쯤 반복하면서 쌍욕을 군데군데 섞어주거나, 손톱만 한 자랑거리까지 닥닥 긁어모아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이상한 논리를 개발해서 억지로 앞에 있는 사람을 띄워주는 것.


그러니까, 그런 친절한 억지를 눈치 보지 않고 부려주는 것. 하루 내내 참아왔을 감정을 거리낌 없이 같이 풀어내는 것. 그렇게, 모두가 싼티나게 즐거워하면서,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shanti)를 슬그머니 회복하는 것. 


뭐, 생각해보니 이 모든 노력이, 어떻게든 술자리를 많이 갖기 위한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아끼는 누군가가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 명랑하게 얘기해줄 수 있다.

 

내가 너의 티가 되어줄게,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걱정의 총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