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Apr 19. 2020

우리는 언제 늙음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네가 들판의 한가운데로 향하는 동안

한가운데로 향하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


나무가 자란 적은 없으려 한다


-시 '모든 것의 근처' 中 (최정진 시집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





어느 휴먼다큐.


자신의 낡은 옷을 버리려는 막내딸에게 84세의 어머니가 역정을 낸다.

"싫어, 버리지 마. 죽기 전에 내가 태우고 갈 거여. 너 안 시켜."

혼자 남아,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의 사진을 보던 어머니가 피디에게 말한다.

"나도 늙고 옷도 늙었잖여...... 옷을 버리면, 내가 버려지는 것 같아서 싫어. 슬퍼."


평생 처음 서 봤을 카메라 앞일 텐데, 그녀의 서운함은 자연스러웠다.

입버릇처럼 '1~2년 안에 가야지'라고 말하던 84세의 노인이 내놓는 속말.

그건 늙음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인정이었다.  



오래전, 엄마가 암 수술을 받았다.

우연히 받은 건강검진에서, 요행발견한 신장암.

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아서 신장 한쪽을 떼어내면 된다고,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회사 첫 출근하는 주니까 휴가는 내지 말라고, 당부하는 아버지 옆에서.

금요일 저녁에 내려간 병원, 4층 엘리베이터 문에 열리자 두 분이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 느낀 늙음이었다.


수술 후 건강해진 엄마는 언젠가부터 늙는다는 말을 최소화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늙음이 가시화될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늙음은 건너뛰어야 할 얘기가 되었다.

 


우리는 과연 언제 늙음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노화를 숨길 수 없게 된 어느 때, 숨겼던 두려움을 한꺼번에 내놓아야 할까,

아니면, 지는 꽃잎을 볼 때마다 자신의 변색을 주책없이 실토해야 할까.


잃어가는 것들의 목록이 길어진다.

인생의 절반 정도 산 나한테도 늙는다는 건 무섭다.

내가 낡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공포는 몸을 불린다.

이 세상에서 소용을 잃어버리다가 버림을 당하겠지, 하는 두려움......

어정쩡한 가치를 지낸 채 어정쩡하게 일상을 유지하다가 끝나겠지, 하는 단정......



문 닫힌 고깃집 앞에 가지런한 철통들.


그 집에서 종종 고기를 먹기에, 쌈장을 담았던 통은 숯을 담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인쇄된 표면의 활자를 상실하고 녹과 긁힌 흔적으로 가득한 통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통은 담기 위한 것일 뿐이다. 안에 빈 공간을 갖고 있는 한, 통은 통으로 기능한다.

주인 역시 그것을 알기에, 낡은 통들을 단정하게 쌓아두었을 것이다.  


기를 쓰고 외면해도 생의 순간순간 노화는 조금씩 발을 내밀 것이다.   

우리는 찾아오는 늙음을 모른 채하며 살 수는 없다.

그건 시간을 빌려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늙음의 근처'로 물러서서 '늙은 적 없는 듯' 있으면,

결국 제대로 된 '늙음의 한가운데'로 갈 수 없지 않을까.


 

외면은 쉬운 일이다. 눈을 돌리고 입을 닫으면 된다.

그러나, 늙는다는 경험을 무시하는 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내는 시간을 아예 지워버리는 게 아닐까.

그 빈 시간을 채우는 건, 늙음을 인식하기 전의 흔들리는 청춘이 아니라,

텅 빈 눈으로 삶의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두려움이 아닐까.


늙음에 대해 얘기할 타이밍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보다,

나라는 최소한의 상(像)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게 낫지 싶다.


뭐 여전히,  거울 속 흰 머리카락을 노려보고,

나의 표면이 긁히거나 우그러지지 않는지 늘 신경 쓰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쉬는 동안의 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