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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21. 2018

공산품에 대한 애착

여행용 3단 자동 우산

맥주가 목젖을 가시화한다

안주가 어금니를 가시화한다


-시 '열대어는 차갑다' 中, 김소연





시간이 똑같이 쌓이는 방법은,
'가까운 거리'밖에 없다.

가까운 곳에 있는 대상에게만 가능한 면밀한 관심.

그 대상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찬가지로.


공산품에게 애정이란 감정을 느낀다고 하면 어쩐지 혼자 남사스럽다.

하지만, 애착,이나 친근함, 정도의 표현이 가능하다면,


파란색 꽃무늬를 가진 3단 자동접이식 우산에 대해 난

충분히 애착했다.



우산을 골라 산 첫 경험이었다.

어렸을 때 우산은 부모님이 어느 행사에 가서 받아온 걸 돌려쓰거나,

아주 급할 때 산 일회용 우산을 아껴 쓰거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산은 굳이, 매장을 찾아가서 골라 살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비 올 때마다 손에 쥐고 다니지만, 정작 면밀히 본 기억은 없는 물건.


몇 년 전, 배낭여행에 챙겨갈 마땅한 우산이 없을 때도 그냥 없이 갈까 했었다.

하지만, 먼 이역 땅의 일기예보를 보니, 여행 기간의 절반 동안 비가 온대서 고민을 하다가

집 근처 편집숍을 찾았다.


조건은 간단했다.
가볍고 부피가 작을 것.

선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어 개 손에 쥔 후 이 우산을 들어보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

구매 후 우산을 사용하면서, 우산의 선택 조건은 몇 개 더 부가됐다.

이 우산이 가진 특질에 맞춰.


버튼 하나로 접고 펴는 게 자동으로 작동할 것. 그리고,

원색이되 어느 풍경에도 잘 어울리는 꽃무늬일 것. 그래서,

비가 와서 우울하고 찝찝한 날에도 우산을 펴는 순간 기분이 좋아질 것.


처음 우산을 사고 갔던 여행지에서 비는 반나절밖에 오지 않았지만,

그 후로 몇 년 동안 이 우산을 애용했다.

여행을 가려고 짐을 쌀 때도 제일 먼저 손이 가는 물건이었고

회사와 집에 있는 여러 개의 우산 중에서 늘 우선으로 선택받았다.



신경 써서 볼 일이 없는 소용(所用)에서,
면밀히 볼 필요도 없이 찾게 되는 애착(愛着)이 돼 버렸달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활은 소용을 필요로 하고, 소용 덕분에 공산품들이 끊임없이 집에 들고 난다.

수많은 공산품들 사이사이, 애착이란 감정을 담은 물건들이 포진돼 있다.

덕분에, 새로 들여서 낯설거나 소용만으로 지쳐 무미건조한 공산품의 세계 속에서

마음 편히 기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 작년 어느 술자리를 끝으로, 이 우산은 증발했다.

메이 브런치, 라는 브랜드를 기억해, 편집숍에도 가고 인터넷 쇼핑 사이트도 찾아봤지만,

사라진 우산과 흡사한 건 찾지 못했다. 아마 몇 년 간 사용하면서 손과 눈에 너무 익어버린 탓인 듯하다.

그렇게 보면 언젠가 대체될 공산품에 과도한 애착을 갖는 게 그리 영리한 일은 아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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