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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18. 2018

늘, 오버사이즈 북 쇼핑

조우 같은 것들을 꿈꾸는 방법

살을 찌우고 빈둥거리는 것 말고 겨울잠에서 깨어나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다음 동면을 위해 꿈 소재를 비축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겨울잠쥐들은 언제나 가장 매력적인 장소를 찾아 돌아다닌다. 우리의 이야깃거리가 될 영감, 주인공, 어떤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소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알레산드로 보파






가까스로, 독서에 대한 강박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식의 당위는 꽤 힘이 세서, 나이가 들고도  오랫동안 시달렸다. 하지만, 책을 읽었을 때의 쾌락과 책을 안 읽었을 때의 불안을 비교했을 때, 쾌락이 불안보다 크다는 걸 경험으로 안 다음부터는, 강박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가까스로 이긴 신승이다)


그럼에도, 책의 구매를 즐기는 축이다. 독서량이 많다는 뜻은 아니다. 일을 하고 음주가무를 하다 보면 하루, 일주일... 시간은 쉬이 채워진다 독서 없이도. 다만, 그 어영부영한 보내는 시간 속에 책 쇼핑하는 시간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요즘은 자주 책을 뭉텅이로 '사제낀다'.


이렇게 '오버사이즈'로 책을 사는 습관은 [학생] 태그를 떼고, [직장인] 태그를 달고 나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태그를 바꿔다는 사이,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읽어야 할 책 목록(학점과 취직 준비를 하기 위한)이 없어졌고, 월급을 받으면서 이전보다 돈을 쓰기 수월해졌으며, 집 인테리어는 책으로 하는 게 제일 편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 당장 읽을 한 권을 책을 사기보다는 그걸 포함한 몇 권의 책을 같이 사곤 한다. 말하자면, 책을 큰 고민 없이 쇼핑하는 셈이다.



책에 쇼핑이란 말을 붙이는 게 좀 불경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을 사는 건
매우 순수한 쇼핑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으로서도.

우선, 돈을 내고 갖고 싶은 물건을 소유하는 쾌감이 있다. 이 소유욕의 기저엔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책도 있지만, 책에 담긴 내용, 책을 쓴 사람의 권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있다. 우린 돈을 지불하고 (이후에 그걸 얼마나 받아들이느냐는 별개로)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책을 사는 과정에서도 순수한 쾌락이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책을 택배로 받아서 포장을  때의 기쁨은 어릴 적 과자 종합 선물세트를 때 느낌과 비슷하다. 고 나면 몇 개 들어있지도 않고, 포장지의 제과회사 상호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가지만, 내내 두근거리는 것이다.


동네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즐거움은 조금 더하다. 대개 약속 없는 주말 오후, 서점의 어두운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 바로 앞에 큐레이션해 놓은 책을 훑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마음에 드는 책을 한두권 손에 들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곧 읽을 책을 손에 들고, 책방 안에 중앙 큐레이션 목록을 눈으로 훑을 때의 포만감은 짜릿하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산 후 집으로 올 때는 금방이라도 손에 든 책 하나를 바로 읽고, 밤새 모든 책을 독파할 수 있을 정도로 의욕이 충만하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마트에서 산 물건과 책을 바닥에 부리고 나면 게으름이 온몸을 덮는다. 내 기력은, 방금 사온 책 하나를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몇 장을 넘기면서 급격히 사라져서, 느긋한 오수 속으로 빠져든다. 느지감치 깨서 저녁을 해 먹고 TV를 조금 보다가 다시 책을 집어 들고 보지만, 늦은 밤 꾸벅꾸벅하다가 책을 덮게 된다. 결국 책을 읽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한아름 사온 책들을 며칠 상간에 다 읽기는커녕, 몇 주일이 가도록 펴보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책상에 무리 지어 쌓인 책들만 봐도 오랫동안 포만감은 지속된다.


요즘은 조금 많이 오르긴 했지만 다른 사치품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도 순수한 쇼핑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책은 부피가 크지 않고 쉬이 상하지도 않아서 쇼핑 자체로 즐기기에 적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쓸데없는 쇼핑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에, 쇼핑에서 오는 쾌락은 순도가 높고 중독적이다. 


이런 이유로 점점 더 책을 오버사이즈로 사고 있다.



이런 오버사이즈 북 쇼핑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한 번 집에 들인 책은, 언젠가 펼쳐진다

광고에 혹하기도 하며 큰 고민 없이 책을 고른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소유욕이 들 만큼의 선택과정이 있다. 장바구니에 담기건, 내 손에 들리건 결국 나에게 매력적인 책들만 집에 들인다는 말이다. 거기에, 주기적은 아니지만 마음 내킬 때마다 책장들을 다 비우고 책 배치를 뒤집으면서, 안 읽은 책들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난장판을 그대로 둔 채, 방금 사온 책인 양, 두근거리며 책장을 펼친다. 종종, 책장에 '미독서' 책들을 물끄러미 보면 민망해져서 얼른 책을 꺼내기도 한다.



이렇게 사놓고 뜸을 들인 다음에 읽는 책들은 나 한 사람을 위한 걸로 치환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창 책이 처음  출간되기 시작할 때, 서점의 매대에 수북이 쌓여 있는 신간들은 왠지 조급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 다 읽을 거 같아서 별로 독서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화제에서 멀어진 어느 시점에, 내 책장에서 단 한 권 꽂혀있는 책은 왠지 모르게 특별해진 느낌이다.



조우 같은 것들이 없어진 시대에,
뜻밖의 만남을 꿈꾸게 한달까.

그렇게 난 오버사이즈 북 쇼핑이 준 안락함을 만끽하며, 쟁쟁한 저자들과 쟁쟁한 문장들을 뒷배로 두고 있다. 늘어지게 누워있다가 아무 책이나 한 권 펼쳤을 때 만나게 될 두근거림을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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