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May 06. 2020

흔적의 흔적, 길상사

#서울 성북동 산책


흐린 날, 비는 봄비의 형식으로 내린다. 

조용히 그러나 구석구석 놓친 곳 없이 적시겠다는 그런. 


우산은 최대한 늦게 펼친다. 카메라는 남방 안을 왔다 갔다 한다.

성벽을 타는 두 종류의 담쟁이는 각자의 색을 위해 열심이다.  

비가 내리면 모든 잎눈에 신호가 갈 것이다.

한성대입구 역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차들은 달리면서 스스로의 목적을 충족하지만, 

지하철 입구 앞 트럭은 멈춰 있을 때 자신의 쓸모를 찾는다. 

충실한 품목을 갖춘 트럭 앞에서, 두 명의 남자가 돈과 봉지를 주고받는다.

 한 남자의 안목으로, 다른 남자의 저녁상이 결정된다. 

거래의 사실은 곧 잊힐 것이다. 



첩첩이 쌓인 풍경을 뚫고 북한산을 본다. 

많은 것들이 한 장면에 담겨서 어지러울 법도 한데, 묘하게 안정적이다. 

늘어선 국기들을 보며, 각 나라의 코로나 대응법 따위가 떠오른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지금이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걷는다. 



큰길을 벗어나 들어간 골목엔 단층이나 2층의 집들이 많다. 

덕분에 산책은 어딘지 모르게 '적당하다'는 느낌이 든다. 

애써 뭘 보려 하지 않고, 애써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 않고, 

애써 사진 찍기에 열중하지 않고, 대충 걷다 가면 된다는 식이다. 


차를 오른쪽으로 바짝 붙인 운전자의 예의가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공들여 차를 관리한 다정함이 느껴진다. 



단정하게 꾸민 작은 숍들이 군데군데 있다. 

왠지 주인이나 아르바이트생들 모두 말수가 적을 것 같은 가게들이다. 


이곳의 가게들은 한두 가지의 품목에 특화돼 있다. 

물건의 가짓수가 적다는 게 완성도를 보장하진 않겠지만, 

선택의 수고로움은 덜 수 있을 것이다. 



별다른 상호 없이 '손세차'라는 세 글자가 걸려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빨간색이다. 가까이 가서 본 벽에도 가게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평형과 간격을 맞춰 쓴 글자들을 보며, 미리 세차 실력을 인정해버리게 된다. 


일요일 오후, 세차장은 비어 있다. 플라스틱 바가지와 호스가 쉬고 있다. 



천주교 성북동 성당을 지난다. 

붉은 벽돌과 선을 구부려 곡선을 만든 십자가 사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성당은 그 자체의 양감을 유지한다. 소리가 없어서 더욱 그렇다. 



길상사(吉祥寺)로 들어선다. 



주차장이 늘 차있어서 보지 못했던 곳이다. 걸어오니 다 해결되는 일이었다. 

비 오는 경내에 사람은 많지 않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느리게 걷는다. 

걸린 염원(願)이 얌전하다. 그대, 라는 단어가 입에 맴돈다. 알아, 라는 단어로 막음 한다. 



발음되지 않는 것들이 탑 주위를 돌고 있다. 



산에서 흘러내린 것들이 이곳에 멈춰있다. 

산을 대변하는 것들은, 늘 산에서 떠나온 것들이다. 

하지만 산의 기척을 피부 안에 넣고 있는 한, 산을 떠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산의 색을 입고 산을 둘러싼다. 



길상(祥)이라는 단어는 소설 토지에서 제일 먼저 접했다. 오래전 도쿄의 키치죠지 역에 갔을 때 그곳이 길상사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가 두 번째였다. 이곳, 길상사의 시작에 대해 검색한다. 몇 명의 이름과 그들의 사연이 빼곡하다. 가늠할 수 없는 시절이고,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들을 복기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게 그들이 이 공간에 버리려던 희미한 무늬였을 것이다.

 


천천히, 비가 적신다. 



법정 스님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한 진영각의 툇마루에 앉는다.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곳이어서 사람들이 꽤 많이 쉬고 있다. 꽃의 선명함이 이 풍경에선 도드라지지 않는다. 돌을 밟고 오는 이들이 전시실을 구경하고 다시 툇마루에 앉는다. 굳이 먼 풍경을 의도하지 않아도 이곳에선 다 가능할 듯한 기분이 든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빗소리를 굳이 들으려 침묵한다. 

공기에 섞여있는 정념(念)을 귀동냥한다. 



먼 지붕 위에 스스로를 버린 낙엽이 가득이다. 

생(滅)의 증거를 쌓듯, 멸(滅)의 증거를 차곡차곡 쌓는 인간의 관성에 대해 생각한다. 

설파하려던 도를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리는 선승(僧)의 고집스러운 미간을 상상한다. 



계절을 맞이하는 문(門)과 시절을 배웅하는 문(問)은 같은 문이다. 

참회와 참선이 같은 문법인 것처럼.



내리던 비가 계곡의 물에 합류한다.

흐르는 물에서 튄 방울로 인해, 계곡의 양 옆은 풍족하다. 

하나의 도(道)가 소리 없이 흘러간다. 

그로 인해 누군가는 풍족해진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흔적이 흔적을 남긴다. 

 


성북동 골목으로 다시 내려온다. 문을 닫은 액세서리 숍 안 마네킹에 눈길이 간다. 


누구나 좋은 날을 꿈꾼다. 좋은 날이 다시 오리라 생각할 수도 있고, 좋은 날이 언젠가 올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우리가 길상(吉祥)이라는 단어에 빚지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소박한 바람이 아닐까. 누군가가 나를 봐주길, 누군가가 나의 화려함을 알아봐 주길, 그럼으로써 내가 그에게 호의적인 눈빛과 말을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원하는 그런. 


산책을 멈추고 통닭집에 들어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정한, 인간의 정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