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네스
1월 14일 (수) 토트네스(totnes)
중심가. 내리는 비. 아담한 영국 전통 찻집 greys dining room에서 다 같이 홍차.
동행했던 G를 알아보는 백발의 주인 할아버지.
사람을 대하는 데에 뚜렷한 장점이 있는 G. 부러워.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는 거.
다 마시고 나와서 ATM에서 돈을 뽑아서 혼자 다시 들어감.
세일 중이던 케이크 포크와 버터나이프 등을 12파운드에 구매.
(선물용 기념품이 한 번에 해결돼서 기분이 홀가분해짐)
5시 숙소. 정리하고 숙소 pub.
나에 대한 G의 평가 - 조용하지만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 (quietly self-assured)
너만의 가장무도회를 들킨 느낌이었어.
넌 그곳에서건 어디서건, 최대한 조심스럽고 예의 있게 행동하되 말을 아끼는(실은 말하기가 귀찮기도 했지만) 전략을 쓰고 있었지. 그렇게 함으로써 깊은 생각이 있는 듯, 고민이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던 거야. 근데, 스스로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G의 말에 당황했지. 너의 가면에서 니가 드러내고 싶었던 건, '사려 깊은 인간' 정도였던 거야.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은 너무 멀리 가버린 평가였던 거지. 너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생각의 매듭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오락가락하는 너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고민 후에 말로써 결정을 내릴 때에도 넌 니 입장을 유보하는 거야. 그건 사려가 깊다고 볼 수도 있지만, 최대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어. 그런 유보를 위해 진중함을 가장하고 있지. 하지만 말이야. 어쩌면,
가장을 반복하면서, 실제가 돼 가는지도 몰라.
니가 나중에 볼 유명한 영화 대사 중에, 'manners maketh man'이라는 게 있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는 다소 위압적인 말이지. 하지만, 매너를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걸 체화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어. 아마 너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있는 척'이라고 넌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고 있는지 몰라. 실제로 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길게 판단할 시간을 갖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해 추가로 생각하기도 하고. 넌 빠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덕분에 섣부른 의견을 내놓은 사람이 아니야. 스스로 확신이 들 때까지 몇 번이고 생각을 반복하지.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것처럼, 같은 생각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첫 번째 생각보다 깊고 넓어진 느낌이 들어. 넌 그렇게 생각을 진행하는 타입인 거야. 하지만 여전히 이런 고민을 할 거야.
너무 조용히 있는 건 아닐까.
확신이 없는 의견이라도 일단 제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난 꽤 오래 그런 생각에 갇혀 살았어. 시간을 너보다 더 뒤로 돌려보면, 어릴 때부터 '숫기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랐거든.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 시절엔 서슴없이 내보이곤 했으니까)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런 성격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지. 아마 지금의 너도 그럴 거고. 그런데 못 바꿔. 바꿀 이유도 없고. 그건 니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인 거야. 그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잘 살았고 앞으로도 잘 살 거야.
하지만 이런 팁은 주고 싶어. 너무 조용하게, 너무 '뒷자리 모드'로만 있지는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이 앞서서 얘기했다고 해서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동조만으로 의견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마.
남들 다 볼 수 있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으니 사람들이 내 입장을 알아줄 거야, 같은 생각은 너무 무책임해.
'굿 윌 헌팅'이란 영화 봤지? 누구나 윌 헌팅이 될 수는 없어. 다른 사람들이 너의 존재를, 너의 가치를 미리 알아보고 돌봐주지 않아. 타인의 '굿 윌'은 없다고 보고 살아야 해.
이런 경험 많을 거야. 다 같이 논의를 하고 난 후에, 왠지 모를 미진함을 느낄 때. 남들이 말한 것 중에 내 생각과 같은 의견이 있어서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있었는데, 끝나고 나니, 내 의견 자체를 말하지 못한 기분. 니가 말을 했건 안 했건 논의에 큰 변화는 없겠지만, 괜히 너 혼자 패배한 듯한 기분. 그러니까,
전략적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아.
그래야 맘도 편해지고
존재감도 자연스럽게 생길 거야.
확신이 없는데 확신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라는 게 아니야. 니 생각이라고 할 만한 걸, 말의 형태로 내보이라는 거야. 그게 동조의 의견이건, 반대의 의견이건 상관없어. 말을 길게 하건 짧게 하건, 자주 하건 띄엄띄엄 하건 그것도 상관없어. 다소 독특한 의견이 아니라도, 인사이트가 뛰어난 의견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의견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는 없다고 생각해야 해. 니가 필요한 자리라 니가 있는 거고, 니가 필요하다는 건 니 말이 필요하다는 뜻이야. 하지만,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무리해서 끼어들거나 불필요한 말을 하지는 마. 전략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차근차근 골라서 확실하게 내놓으면 돼. 어려울 거 없지 뭐.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