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선예도 낮추기

#라왈핀디

by 너무 다른 역할

6월 11일 (토) 라왈핀디, 파키스탄


라자 바자르(Raja Bazar)에 내려서 막막.

한참 걷고, 길 잘못 들어서 가는데, '이자지'라는 애가 가방 들고 자기 가게로 가다가

말을 걸더니, 다른 호텔에 길을 물어서까지 도와준다.

내가 찾던 숙소 Popular Inn은 정말이지 시장의 구석에 위치해 있었음.

2층에서 손을 흔드는 주인아저씨.


(...)

방명록엔 2년 전 거지만 괜찮은 정보가 있었다.

의욕이 조금 생겼다. 여기서 오랜만에 관광 좀 하고, 이틀 밤 정도 있다가 가야겠다.

파키스탄에 대한 괜한 꺼림도 좀 가라앉히고 말이지.

이렇게나 빨리 이동하려는 건, 뭔가, 더위에 진 것과는 또 별개로

두려워서인 듯하다.


(...)

오늘도 정전은 한 시간도 넘게.




#파키스탄 #라왈핀디 #라자바자르


기억은 편견이 심해. 그래서,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장면들의 투명도는 장소에 따라 제각각이지

파키스탄에서의 장면들은 많이 흐려. 짧지 않은 기간이었는데도 말이지. 그 이유가 뭘까, 종종 생각하곤 했어. 그 나라가 관광지로는 많이 개발이 안 된 곳이었다, 거나, 여행한 지 3개월이 넘어가면서 '볼거리'에 대한 갈구가 현저히 떨어졌다, 가 대답이었지.

오랜만에 그때 수첩을 들여다보니 보다 구체적인 답이 있네. 넌,


새로운 모든 게 두려워진 거야.

이상하지? 여행 내내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것들을 마주쳤었는데 지금 갑자기 두려워졌다는 게. 이유는 간단해. 니 옆에 친구들이 없다는 거지. 초반의 일주일을 제외하고 너는 혼자인 적이 없었어. 친구와 둘이 한 달 남짓 여행하다가, 쿤밍에서 한 사람을 영입(?)해서 한참을 셋이 다녔지. 성격과 여행 스타일이 제각각인 세 사람이어서 중간중간 의견도 갈리고 삐치기도 했지만, 꽤 안정적이었어. 물건을 살 때는 누군가 먼저 흥정을 하다가, 한 사람이 도와주러 가고, 마지막엔 세 사람이 다 같이 흥정을 하곤 하는 식이었지.


새로움을 마주하는 순간에 중요한 건
주춤거리며 살짝 뒤로 물러설 때야.

불확실이 가득한 새로움이 앞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순간 주춤거리게 돼. 특히 많은 준비 없이 길을 따라 도착한 여행지에서라면 더더욱. 지금까지는 한 발짝 물러섰을 때 친구들이 버티고 있었어. 그러면 넌 주춤거림을 멈추고 안정된 자세를 되찾았지. 그 상태에서 새로운 풍경이나 사람들을 봐왔던 거야. 하지만 지금 니 뒤엔 허허로운 공백뿐이야. 그래서 새로움을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거야. 뉴델리에서 혼자가 된 후로 암리차르를 거쳐 국경을 넘어 라호르를 찍고 여기까지 오기까지 죽, 넌 조급해졌어. 그때의 수첩을 보면, 짜증과 불만이 가득해. 흐릿하게 남은 기억을 더듬어보는 나도 그래. 별다른 즐거움 없이, 이동하기에 급급했었어. 라호르에서는 정말이지 모스크 하나 보지 않고 떠났지. 넌 지금,


딱 니가 느끼는 조급함만큼,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혼자라는 사실에, 그러니까 눈 앞에 새롭게 나타난 모든 것을 혼자서 '견뎌야'한다는 강박이 생겨버린 거지. 시간을 견디기 시작한 순간부터 너의 여행은 푸석푸석해졌어. 길을 따라갔지만 멍한 시간이 많았지. 두려움이, 강박이 니 얼굴에서 여유로운 웃음을 빼앗은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깝지만, 넌 지금 그런 감상조차 가질 수 없겠지. 너한테 지금 길은, 시작했으니 마무리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게 돼버렸으니까.


두려움이 많아지면서, 고마워하는 게 적어졌어.

이건 그즈음 니가 쓴 일기들을 보고 얘기하는 거야. (아까 말했듯이 기억이 너무 흐려서... 기댈 거라고는 사진과 수첩뿐이네) 니가 적어놓은 것만 보면 너는 파키스탄의 모든 곳에서 친절한 도움을 받았어. 지금처럼 GPS는커녕,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던 너한테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가와 말을 걸고 길을 알려줬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버스를 반대로 타서 표지판 하나 없는 대로에 내린 너에게 스즈키 트럭을 개조한 교통수단을 타라고 권하거나, 바자르 한 복판에서 막막해하는 너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거나. 그런데, 넌 그런 것들을 '팩트'로만 적고 있어. 고맙다는 감상은 빠져있지. 조급과 불만, 짜증은 수없이 적었으면서도 말이야. 다행히 이날 숙소에서 방명록을 보고 의욕이 조금 살아나긴 했지만, 파키스탄을 거쳐 위구르 지역에서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전반적으로 넌 힘들어했어.


그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즐기라거나, 평생 니가 파키스탄 여행을 다시 갈 기회가 얼마나 되겠냐는 같은 조언은 아마 지금의 너에겐 별다른 모티베이션이 되진 않을 거야. 이미 두려움이 머릿속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하지만,


두려움을 조각조각 내서 들여다보면,
두려움의 선예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넌 조그마한 시그널들을 하나로 뭉치는 습관이 있어. 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조그만 일들을 곱해버리는 거지. 특히 부정적인 감상에 빠졌을 때는 더 그래. 지금 넌 조급해하고 불안해하고 있어. 그러면 평소에는 그냥 넘겼을 것들이 턱턱, 니 머릿속에 쌓여버리는 거지. 감정의 동맥경화처럼.


그러지 말고 말이야, 어디에 앉아서 천천히 그 반대 과정을 해봐. 니가 뭉치고 굴려서 커져버린 '두려움'이라는 덩어리 위에 여러 개의 선을 그어서 조각으로 나누는 거야. 기준은 세부적일수록 좋아. 여행경비, 취업 걱정, 안전, 위생, 더위 뭐가 됐든 구체적인 기준을 만들어서, 두려움을 해체하는 거야. 말하자면,


대응책을 떠올릴 만한, 만만한 수준으로 만들달까.

구체적인 문제에는 구체적인 답이 떠오르지. 예를 들면, '더위'가 촉발하는 짜증은, '에어컨 있는 건물로 피신'이나 '야외 이동거리의 축소' 혹은 '버스 대신 큰 맘먹고 택시' 같은 걸로 해결할 수가 있는 거지. 그런 과정이 몇 개 이어지면 니 앞의 두려움은, 그 부피가 줄어들 거야. 없애라고는 나도 말 못 해. 실은 지금의 나도 그런 것들을 도처에 놔두고 살고 있거든. 하지만 만만한 수준 정도로 부피가 줄어들면 해 볼만 하지.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대처하면서. 그러면 얼마 남지 않은 니 여행도 조금 나아질 거야.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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