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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21. 2020

훔치고 싶은 한낮의 공원

#동네 산책 : 혜화 낙산공원

"그 사람과 몇 번 섹스를 했어."

"호기심과 탐구심과 가능성." 나는 말했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그래, 호기심과 탐구심과 가능성."

"그렇게 우리는 나이테를 만들어가지."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그녀는 말했다.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중, 무라카미 하루끼





공원의 초입.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운동을 하다가 쉬는 중인지 숨을 빠르게 쉬있고, 다른 남자는 파란색 재킷을 입고 휴대폰을 보고 있다. 가쁜 숨의 남자는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고, 다른 남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난 두 남자 사이를 빠져나와 오르막의 중간쯤에 가서 뒤를 돌아본다. 이제 두 남자 모두 나를 보지 않는다. 그제야 남자 하나를 몰래, 카메라에 담는다.


나도, 사진에 담긴 남자도, 담기지 않은 남자도 모두, 다 남자라고 불러도 될 나이다. 하늘이 더없이 파란 날이어서는 아니다.



수많은 하늘을 경험했을 성벽은 오늘의 하늘을 특별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하늘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오늘의 하늘 오늘이라 특별하다. 맑다, 밝다, 파랗다, 시원하다, 깨끗하다,  명징하다, 상서롭다, 여여하다 같은 표현을 하나씩 삭제하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한 겹 정도 내 기억에 남을 정도의 얇은 하늘이다. 구름이 눈 안으로 낙상한다.



낙산공원에서 사람들은 주로 성벽 밖을 본다. 그 편이 가슴이 시원하다. 하지만 길의 반대쪽의 숲도 좋다.


이곳의 숲은 사시사철을 잊지 않고 분주하다. 지금은 짙은 여름을 준비하는 중이다. 곧, 봄에 짧게 드러난 흙은 잎으로 감춰질 것이다. 내 안에 쌓이는 무용한 생각들을 몰래 버리고 가도 잎이 덮어줄 텐데, 라는 무용한 생각을 한다. 까치가 성벽을 잠시 밟고 숲으로 날아가는 한낮이다.



길을 따라 제2전망광장으로 가다가 중간에 뒤를 돌아본다.


전망광장이 굳이 따로 필요까 싶은 풍경이 보인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벽 위의 공원과 벽 아래의 마을이 나뉜다. 벽은 사람들의 엄습을 막고 있는 듯도 보이고, 나무들의 치기(稚氣)를 말리는 듯도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벽은 뭔가를 기어코 나누지는 못 듯하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등지지 않는 풍경이다.



제2전망광장에서 도시를 본다. 도시 안에 있으면서 도시를 본다는 말이 웃기지만, 공원이라는 게 우리로 하여금 자연에 있다고 느끼게 기만하는 게 목적이므로, 그걸 충실히 따라 도시를 관망한다. 호기심이나 탐구심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광경이다. 좋아하는 색과 조형이 넘치니 하나씩 눈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초입에 있던 남자 하나가 어느새 광장으로 걸어온다. 사진에 담겼던 남자다. 하얀 머리가 그가 입고 있는 재킷이나 바지처럼 단정하게 내려앉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고, 찍은 사진을 유심히 쳐다본다. 아까 벤치에 앉아서도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역시 오늘 하루의 하늘을 특별하게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휴대폰 안으로 하늘이 몽땅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그는 나와 같은 동선을 따를 테니, 이 정도의 바람은 자연스럽다.



직선의 건물들이 하늘의 색을 빌리고 있다. 구름 덕에 가능한 일이다. 태양이 그대로 내려왔으면 건물의 색만 강해졌을 것이다.



넓게 펼쳐진 광장에서 잠시, 왼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나간다. 한성대 쪽이다. 벤치가 두 개 있는 작은 나무데크에서 풍경을 감상한다.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았기에 내 눈높이가 성벽의 중간쯤이다. 오는 동안 깨금발로 성벽 너머를 봤기에, 갑자기 눈이 편해진 느낌이다.


나와 동선이 같은 남자가 잠시 뒤에 옆에 선다. 남자의 하얀 머리에 빛이 반사된다. 많지도 않게 두 장, 남자가 풍경을 담는다. 어김없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감상한다. 남자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의식되지 않음이 편해서, 방정맞게 셔터를 누르던 나도 괜히 남자를 따라 한다.



성벽 아래 첫 집 옥상에서 한 여자가 호미질을 한다. 세상 힘차다. 그녀가 마련해 놓은 좁은 정원에 뭐가 심길까. 몇 달 뒤 다시 이 자리에 서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나나나 망고스틴 같이 뜬금없는 식물이 잔뜩 싹을 틔울 수도 있겠다. 왠지 그래도 편안한 풍경일 듯하다. 여자가 호미질을 멈추기 전에 다시 광장 쪽으로 나간다.



광장을 지나, 좁은 도로 맞은편의 전망대로 간다. 한낮의 볕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옹기종기다. 사람도 아파트도 나무도 구름도. 렌즈 갈아 끼면서 한참을 그곳에 머문다. 벽을 찍고 풀을 찍고 마을버스를 찍고 하늘을 찍고 두 할머니의 톤 높은 대화도 찍었다.


문득, 같은 동선의 남자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단정한 남자는 어느 방향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있을까. 풍경 안을 뒤져보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세상에서 사라질 건 아니겠지만, 왠지 어딘가로 떠나버린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언젠가 다른 도시의 공원을 산책할 일이 있으면 그가 다시 나타날 듯도 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같은 동선을 따르면서.



관(管)을 실어온 남자가 줄을 끄른다. 곧, 관들은 묻힐 것이다. 그 안으로 흐르는 것들이 아주 조금씩, 관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늘을 실어 나를 것이다. 동대문 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짐칸을 비운 트럭을 지난다. 트럭의 바로 옆 정자(亭子)가 뷰포인트지만 트럭에 한참 시선을 뺏긴다. 프레임 안에 담긴 트럭이 매력적이라, 트럭을 한 바퀴 돌면서 서서 찍고 앉아서 찍는다.


이유 없이 마음에 드는 게 종종 있다. 그건 보편적인 호기심과 탐구심과 가능성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겠지만, 그걸 찍은 사진이 잔뜩 폴더에 있는 건 왠지 기분이 좋다. 폴더를 열 때마다 한 장씩 흐뭇하게 쳐다보게 된다.


트럭 운전사는 보이지 않는다. 대충 세워놓은 걸로 보아 이곳이 집은 아닐 것이다. 실어 갈 무언가를 가지러 갔거나, 실어 온 무언가를 건네주러 갔을 것이다. 빈 상자들을 고정해 놓은 꼼꼼함으로 보아 말수가 적은 사람일 거라 상상한다. 확인할 길은 없다. 한참 사진을 찍고 정자를 뜰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득, 그녀,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곳의 뷰는 실망시키지 않는다. 허리 높이의 난간 에 시선을 막는 장애물이 없다. 가까이 있는 나무와 먼 곳의 나무가 한 가지 색이다. 네모난 지붕을 가진 건물들이 시선 끝까지 이어진다.


짙은 구름이 해를 가릴 때, 풍경에 내리는 광량이 달라진다. 두께와 색이 다른 구름 떼가 연이어 온다. 극적으로 짙은 구름일수록, 극적으로 달라진다. 똑똑한 카메라는 알아서 결과물의 밝기를 조절해준다. 극적임을 감상하는 건 눈뿐이다. 열심히 찍으면서도 열심히 본다. 둘 모두 호강이다.



정자를 기점으로 아래쪽은 이화마을이다. 성벽과 성벽 옆으로 나 있는 길은 공식적으로는 계속 낙산공원이겠지만, 길 아래쪽은 공원과 다른 공간이다. 벽화마을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벽화에 특별한 감흥은 없다. 그 때문에 동네가 번잡해져서 오히려 벽화에 더 관심이 없어진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광객이 몰리는 휴일에는 잘 오지 않는 곳이지만, 지금은 한적하다.


작은 나무의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고민한다. 마을을 바로 가로지를지, 조금 더 빙 둘러가다가 들어갈지의 차이다. 한가하게 산책하는 나한테는 별로 의미 없는 차이다. 길 멀리 장미꽃이 보인다는 이유로 오른쪽을 택한다.



장미를 구경하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또 장미가 있다. 문 닫은 목공소 앞의 아치에 따라 뻗고 있는 장미 넝쿨 중간중간이 붉다. 한 모녀가 사진을 찍고 있길래 잠시 기다린다. 둘이 번갈아 포즈를 취하길래 민망할까 봐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면서. 잠시가 조금 더 길어지지만 상관없다. 두 사람의 휴대폰에 장미가 가득일 것이다.


두 사람이 골목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나 혼자 장미를 잔뜩 찍는다. 한 커플이 카메라를 90도로 들고 위를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 내 옆을 천천히 걸어간다. 담고 싶은 걸 담았지만 둘이 지나갈 때까지 그 자세로 조금 기다린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내 카메라에도 붉음이 가득이다.



길이 이어진다. 여전히 벽화는 그다지 눈에 들지 않는다. 길은 아래로 이어지고 옆으로도 이어진다. 길이 가는 곳에 전선이 있고 문(門)이 있다.


가파른 계단의 맨 위에서 사진 한 장을 찍는다. 동선이 같았던 남자처럼 또 한 장을 찍고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한낮의 풍경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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