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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26. 2020

그해, 라는 물음표

#티베트, 2005년

레이먼드 카버는 계속 썼고, 계획했고, 희망했다. 카버가 죽고 난 후 갤러거는 카버의 셔츠 주머니에서 '잊지 말 것'을 적어 놓은 쪽지를 발견했다.


달걀

땅콩버터

핫초콜릿


오스트레일리아?


남극 대륙??


-에세이소박한 여행 中, 필립 한든





하루에 한 대 있는 버스였다.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러 조캉사 근처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라싸 중심에서 몇 시간 떨어진 시골에 있는 (지금은 그 이름을 잊어버린) 사찰에 가기 위해서였다. 버스는 시내에서 멈추다 가다를 반복하며 사람들과 물건들을 실었다. 농기구부터 이불까지 수많은 물건들이 버스 지붕에 올려졌고, 무작스러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좌석을 채웠다. 버스 안의 유일한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웃음을 던져주었다. 만차(滿車)라는 느낌이 들 즈음 버스는 외곽길로 들어섰다.


*


해발 3,650m의 고원은 거짓말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산과 집과 하늘, 구름은 희박한 공기 안에서 하나로 이어진 느낌이었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꾸밈이 없었다. 자연에 더해진 사람들의 의도는 과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품고 있는 자연의 기세는 순했다.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의 허례(虛禮)가 사라질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해발 38m의, 정신없는 도시에서 온 여행자에게는 더더욱.


*


버스는 마을마다 길게 정차했다.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온 듯한 사람들이 버스를 반기고 운전기사를 반겼다. 주차랄 것도 없이 길 한가운데에 차를 세운 기사는 시동을 끄고 주문받은 짐을 마을에 부렸다. 그는 능숙했지만 급하지 않았고, 도시의 소식들을 전하는 듯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말을 했다. 버스는 스스로 하나의 소식(息)이었다.


티베트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던 우리 셋은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우리는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다시 빙글빙글 웃었다.


*


두어 시간쯤 흘렀을 때, 버스 안 사람들 모두에게 야크버터 차가 대접됐다. 마을 사람이 올라타서 따라준 건지, 처음부터 같이 타고 왔던 사람들이 서빙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냄새며 맛이 영 취향에 맞지 않았던 야크버터 차를 얼결에 받아 들고 어쩌지라는 표정을 짓던 우리의 모습만 기억난다. 배탈 걱정이 들었지만,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고, 한두 모금 찔끔거리다가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호의가 천천히 몸 안에 퍼질 즈음 차는 다시 출발했다.


*


짐이 하나씩 줄고, 사람이 한둘씩 내리면서 버스는 가벼워진 듯했다. 맑은 날은 여전히 맑았고, 파란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마을마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마다 각자의 평온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쩌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자외선 때문에 빨갛게 탄 뺨을 움직여 한껏 웃어주었다.


당시 스물다섯, 스물셋이었던 우리들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세상이었다.


두 달이 넘게 새로운 풍경을 지나쳐왔고 라싸에서도 벌써 여러 날 머물렀지만 눈에 담고 싶은 것들은 여전히 밀려들었다. 우리가 중간중간 졸면서도 창 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버스는 외길을 따라 종점인 사찰에 도착했다. 버스기사는 두 시간 후 다시 시내로 출발한다고 말했다.


*


사찰은 가파른 골짜기를 완성했다.


고원의 산은 인간과 하늘의 중간에 있었다. 내처 하늘을 올려다보려는 사람들의 시선을 막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쏟아내려는 하늘의 무책임함을 방해하며. 사찰은 산이 시작되는 곳에 지어져 스스로 산 한 부분이 되어, 하늘과 사람의 중간에서 양쪽의 욕(欲)을 담아내고 있었다.


*


그런 이유로 사찰은 평화롭지만 생동감이 넘쳤다. 거침없는 빛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숨길 것 없는 대화를 나눴다. 무슨 의미인지 알 턱은 없었지만, 그들의 옆에서 마침표와 물음표, 느낌표를 몰래 주웠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


경내를 구경한 후 일행과 떨어져 혼자 사찰의 뒤로 향했다. 승려 몇 명이 개울에서 조그만 개울에서 빨간색 가사를 빨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하고 개울을 건너니 낮게 자란 풀이 가득한 초원이 있었다. 골짜기에 있는지라 넓지는 않았지만 수십 마리의 야크를 치기에는 충분한 듯했다.


초원 쪽으로 걸어가니 멀리서 큰 개 두 마리가 뛰어왔다. 개들에게 이방인에게 보낼 여유로운 웃음 같은 건 없어 보였다.(적어도 순간 공포심을 느낀 내가 보기엔 그랬다.) 뒤로 돌아 뛰어가야 하나,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소녀가 나타났다.



대여섯 살, 많아야 여덟 살 남짓한 소녀는 개들을 향해 몇 마디를 했다.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던 개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소녀의 발치에 몸을 깔고 앉았다. 소녀는 바위에 앉으면서 나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예의 후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지었다.


난 소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우리는 다시 마주 보고 웃었다. 서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았거나 아니면 한족의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소녀는 나의 짧은 중국어나 영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고, 나 역시 그녀의 티베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건넨 중국어나 영어가 그곳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무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는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얼마나 반가운지 등등.


서로의 언어가 서로의 귀에 리듬으로만 들렸다. 밀도가 낮은 공기 안에서 리듬은 가벼웠다.



내 멋대로 이해한 바에 따르면, 소녀는 절 아래 마을에 살고, 멀리 보이는 곳에서 가족들이 일하고 있었다. 자기는 야크 떼를 돌보고 있으며, 개들은 소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나의 말을 대충 자기 맘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 삼촌은 멀리서 여행을 왔고, 방금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친구들은 아직 사찰을 구경하고 있고 혼자서 뒷문으로 나왔다.


웃어주면 웃음이 돌아왔고, 그 웃음에 다시 웃음을 돌려보냈다.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내 이름을 두어 번 반복해서 말해주니, 소녀도 자기를 가리키며 이름을 말했다. 이시바추.


카메라를 가리키며 너를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고 카메라 쪽으로 몸을 고쳐 앉았다. 수줍다기보다는 즐거워 보이는 웃음을 가득 지은 채. 지금이었다면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동영상이라도 남겼겠지만, 15년 전에 내가 갖고 있던 건 조그만 토이 카메라 한 대뿐이었다. 두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소녀의 나이를 알기 위해 대화 아닌 대화를 시도했다. 숫자를 땅에 그려보기까지 했지만 실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녀는 자신의 나이나 나의 나이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걸 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평소에 보지 못한 이방인을 조금 더 관찰하는 게 즐거웠을 수도 있다.


*


친구가 멀리서 버스 시간이 다 됐다고 외쳤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녀도 따라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웠다고 한국말로 말했다. 소녀도 티베트어로 말했다. 뭐라도 기념이 될 게 없을까 가방을 뒤졌지만 별게 없었다. 제대로 된 기념품 몇 개라도 챙겨 다닐걸 후회했다. 볼펜 몇 개가 있길래 눈짓을 보냈더니 끄덕였다.


다시 개울을 건너 사찰의 뒷문으로 들어가며 중간중간 뒤돌아볼 때마다, 소녀는 그 자리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버스는 사찰에 내렸던 사람을 남김없이 태우고 출발했다.


*


그해, 여행을 떠날 때 나한테 물음표가 가득했다. 정해진 진로도 없이 졸업하자마자 떠나온 길이었다. 세 달여 여행을 하면서도 고민을 버리지 못했었다. 지금은 웃으며 추억하지만, 그때의 여행수첩을 들추면 걱정이 쏟아져 나온다.


'그곳에서 만난 이시바추는 물음표 따윈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지금 나는 기억하지만, 어쩌면 내가 남들에게 바라는 모습을 그녀에게 투영해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녀 역시 나름의 물음표를 몇 개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둘이 마주친 잠깐 동안, 나와 그녀는 걱정 없이 웃고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


그해는 선명한 마침표보다는 색이 모호한 물음표로 남아 있다.


길 위에서 나는 내내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건 적당히 소란스러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거면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확실한 답을 주었다면 길을 따라가기를 멈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멈춰 선 딱 그만큼 밋밋한 혼란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종종 떠올릴, 그해, 라는 물음표가 있다. 굳이 '잊지 말 것'이라고 쪽지에 적어 셔츠 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덕분에 바이러스로 옴짝달싹 못하는 이 상황에서도 저곳의 하늘과 웃음을 잠시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다. 티없이 웃어주던 소녀의 호의도.



*표시가 있는 사진은 친구가 디카로 찍은 사진이다. 디카가 보급되기 얼마 안 된 2005년, 후지 디카를 여행에 가져온 친구에게 새삼 고마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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