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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05. 2020

너무나 조용한 자축

#포항 영일대 해변

우리는 마음 속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주위의 사람들이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며 귀에 들리는 소리며 허파를 가득 채우는 공기 따위를 신임하며 살아간다.


-소설 '로드 짐' 中, 조셉 콘래드





평일 밤, 해변은 붐비지 않는다.


조용히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어느 바위에 자리를 잡는다. 소나무의 그늘이 위장막이 된다. 덕분에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처럼 앉아 있을 수 있다. 옆의 옆 바위에서 맥주를 마시던 50대 부부 두 쌍이 잠깐 쳐다봤으나 이내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나는 느린 움직임으로 카메라를 세팅한다. 10여 미터 떨어진 난간에 한 커플이 앉는다. 차도의 소음이 그들의 조용한 대화에 막히는 듯하다.



목표는 포항제철의 수증기였다.


2002년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고복수(양동근)가 포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며 예쁘다고 감탄했던 그 밤 풍경을, 드라마가 끝난 지 18년 만에 보러 온 길이다. 이상한 시기에 낸 휴가였고, 달리 떠오르는 여행지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찍고 싶은 대상이 정해져 있었기에 밤 9시 숙소에 도착 후 바로 해변으로 나왔다.



포항까지 오는 중간중간, 지난밤에 점찍어뒀던 몇 개의 장소에 들렀다. 포항제철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으니 마무리를 한 기분이다. 숙제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나름 숙제 같이 느끼고 있었겠다 싶어 혼자서 피식, 한다.


공정을 이겨낸 수증기가 바다의 풍경으로 날아간다. 밤의 공기에 스민 수증기의 거처는 먼바다일 것이다.



젊은 남녀 몇 명이 폭죽에 불을 붙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폭죽이 궤적을 잃으며 터진다. 흘러나오는 빛과 소리의 속도는 다르겠지만, 둘 중 어느 것 하나가 없어도 사람들은 폭죽을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폭죽은 스스로의 명멸을 자축하듯 사라진다. 사람들이 무엇을 축하하려고 하는가 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자신의 빛을 바다에 반사할 틈도 없이 빠르게. 사람들은 느리게 흩어지는 포연으로 아쉬움을 달래지만, 이내 연기도 자취를 감춘다. 폭죽 장사가 눈으로 다른 소원을 물색한다.



바다의 경계가 이곳의 사람들처럼 조용하다.


베이지색 개를 산책시키는 커플이 바다 쪽으로 붙어 지나간다. 앞서가던 남자를 따라 뛰던 개가 뒤를 돌아본다. 여자가 손짓으로 먼저 가라고 하지만 개는 여자 쪽으로 되돌아가 여자의 같은 속도로 걷는다. 남자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앞서 걷는다.


셋이 지나간 허공엔, 셋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모래밭에 찍혔을 발자국도 물이 밀려오면 사라질 것이다. 결국 셋의 흔적은 셋에게만 남는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의 흔적을 담고 있는 서로를 수긍할 것이다.



남자 한 무리가 폭죽을 사들고 나의 바로 앞쪽에 자리를 잡는다. 나는 여태 느리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카메라의 방향을 바꾸고 수평을 맞추는 동안, 다행히 그들은 불을 댕기지 않는다. 바쁠 거라고는 없어 보인다. 산책을 하다가 얼결에 폭죽 몇 개를 사 온 듯하다. 시간으로 봐서는 회식의 1차가 끝났을 시간이다.


연달아 폭죽이 날아간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빛이 뿌려진다. 잠시 다 같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폭죽대를 대롱대롱 손에 들고 해변을 벗어난다. 점잖아 보이는 그들의 얼굴이 한껏 풀어져 있다. 구두 안에 들어갔을 모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듯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카메라를 정리하면서 뒤를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있다. 별다른 기척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저마다 조용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밤의 여유가 묻어난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온 임시 여행자에게 바다라는 풍경은 일탈이지만, 바다 옆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일상일 것이다. 온전한 무게로 자리 잡은 일상을 즐기는 이들에게 소란은 찾을 수 없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바로 숙소로 가려다 뭔가 아쉬워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다른 곳에 앉는다. 잠시 후,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테이블과 의자 등등을 들고 나타난다. 그는 해변의 중간에 자리를 잡는다. 왠지 능숙해 보이는 움직임이다. 그는 테이블의 왼쪽에 맥주캔을 꺼내놨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옮긴다. 의자 위에서 몇 번 몸을 움직여 자리를 잡는다. 그 역시 컴컴한 바다보다는 포항제철의 야경 쪽을 향해 있다. 의자에 편하게 몸을 묻은 그가 캔을 따고 안주를 집어먹는다. 그는 풍경의 안에서 자신을 즐기기 시작한다.


먼 빛으로 온건해진 해변, 조용한 자축 위로 밤이 천천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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