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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10. 2020

수백 번째의 여름

#경북 안동 송사동 소태나무


"강아지 이름이 뭐야?"

"이름 없어요. 그냥 개예요."

"아..."


'개'는 아이의 손에 번쩍 들어 올려진 상황에서도 꼬리를 흔들고 있다. 땅에 있던 다른 '개'는 아이 품의 강아지를 보고 꼬리를 흔든다. 당연히 개들에게 이름이 있으리라 생각한 게 우스워서 살짝 웃었다. 그래, 이름 따위 뭐. 그냥 발랄하면 됐지.


"아직 안 지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개예요."



개를 땅에 내려놓자 두 마리가 한데 뭉쳐 사방으로 뛰어다닌다. 둘의 표정에서 경계심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교육받은 대로 질문을 한다.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잠깐 저 뒤에 나무 구경하러 왔어."

"아..."



그 아이들에겐 학교에 하고많은 큰 나무 중의 하나일 테니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이다. 흥미를 잃은 아이들이 등을 돌리고 수돗가 쪽으로 향한다. 개들이 호랑이와 악어가 있는 연못가를 돌아 아이들을 따라간다.


오후 4시, 볕은 한여름이다.



내비게이션은 나무에서 가장 가까운 길이랍시고 학교 뒤의 둑길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마주 오는 차를 비껴갈 공간 하나 없는 좁은 길 한가운데서 '안내를 종료'해 버렸다. 담장 안에 있는 나무가 창밖으로 보였지만, 차를 세울 수 없는 곳이었다. 한참 더 간 후에 겨우 차를 돌려 반대편으로 향했더니, 학교가 나왔다.


정문 옆에는 나무가 학교 건물 뒤편에 있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운동장을 지나 뒤로 가니,  나무는 오래된 교사(校舍) 옆에 있다.


깔끔하게 관리된 건물은 지금은 교실보다는 창고로 쓰이는 듯 보인다. 그 옆에 새로 지은 교사도, 오래된 교사도 모두 1층으로 아담하다. 교정 안에 즐비한 아름드리나무만 봐도 학교의 역사는 오래됐을 텐데, 여전히 '분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걸 보면 아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많지 않은 아이들은 나이를 먹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분교는 여전히 분교인 채 남아 있다. 빈 신발장과 굵은 나무들을 간직한 채.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소태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동신목(木)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이라는 설명이, 나무 앞에 세워진 표지판에 있다. 설명 문안을 적은 이는 조심스러운 성격일 것이다. 그는 '가장 크고 오래됐다'는 단언 대신 '평가된다'라고 적었다. 높이와 수령은 지극히 물리적이어서 평가의 영역은 아닌데도 그렇게 적었다는 건, 어딘가에 조금 더 높거나 오래된 소태나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추후에 그런 나무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이 나무가 이곳에서 살아온 세월과 나무가 책임지는 그늘은 그대로일 것이다. 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 역시 그대로일 것이다.



'회화나무·느티나무 및 팽나무 등 10여 그루의 나무와 함께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근처에 신을 모셔놓은 집인 서낭당이 있고,

여러 그루의 크고, 오래된 나무가 함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숲인 성황림으로 보호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설명 中)



서낭당, 당집, 신목 같은 단어와 무관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것들을 마주하게 되면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무례하지만 않으면 슬쩍 나의 안녕을 소원해도 될 듯한 그런. 아마 땅과 나무의 색과 형태가 주는 편안함 덕분일 것이다.


이곳의 당집과 나무 앞에서 사람들은 안녕을 소원하고, 소원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기원이 당집 지붕 위 이끼처럼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땅 바로 위에서 갈라진 두 개의 줄기 중 하나는 중간에 잘려있다. 어느 계기로 부러진 부분에 인공물로 막아 살렸다. 자세히 보니 줄기의 중간에도 마찬가지의 보수 흔적이 보인다. 썩은 부분을 도려낸 공간을 채웠을 것이다. 자연 상태였다며 쓰러졌겠지만 사람들은 나무를 '지정'하고, '보수'하고 '보호'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나무를 보며 안정을 얻었고, 나무는 그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을 연장했다. 나무의 기원이 생(生)만은 아니겠지만, 계절을 반복한다는 건 나무의 소박한 꿈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무는 수백 번째의 여름을 맞고 있다.



살아남은 줄기에서 피워낸 잎이 꿋꿋하다.

더할 나위 없는 녹색이다.


바람이 분다.

잎이 잠시 볕을 놓고 제 모양을 흐트러뜨린다.



경계는 나무들을 모아 두르고 있다.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 소태나무와 주위의 나무들 사이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긴 세월 동안 서로의 기척을 맞춰왔을 것이다. 누가 누구의 앞이라거나, 누가 누구보다 위라는 개념 따윈 떠올리지 않은 채. 각자의 땅을 옮길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가지와 잎이 다른 나무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게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바람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공명하며 지나간다.



돌아 나오는 길, 운동장의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한참 머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하나의 물결로 움직이며 소리를 낸다.


익숙한 소리다. 내가 맞이했던 수십 번의 여름 안에서 늘 듣던.




*안동 송사동 소태나무는 천연기념물 174호다.


*내비게이션에는, '길안초등학교 길송분교'를 치고 가면 된다.

학교 앞의 길이 넓어, 학교의 정문 옆 담벼락에 주차해도 다른 차가 지나갈 길은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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