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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29. 2020

내셔널지오그래피컬 맥심

#그녀는 왜 남성잡지를 숨겼을까

평일 오후, 약속시간보다 넉넉하게 나와 을지로의 한 서점에 갔다. 진열 코너들의 취향이 강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입구서부터 구경하다가 잡지 쪽으로 갔다. 잡지코너는 총 3열로 돼 있었다. 가장 앞 쪽 열에 주간지, 월간지 들이 있었고 남성지, 여성지, 시사지 등의 구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성지 쪽에는 해외 브랜드 잡지의 한국판 외에, 19금 잡지도 몇 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맥심(MAXIM)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는 처음 보는 19금 남성지도 몇 개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표지모델에 눈을 빼앗겼다가, 표지에 있는 나머지 기사 타이틀을 대충 훑었다. 길게 읽을 내용은 아니었기에 다른 섹션으로 갔다.


그렇게 서점을 크게 돌고 한 군데 앉아서 책을 읽다가, 다시 잡지 코너로 갔다. 남성지 옆 매대에 있는 잡지를 살까 말까 고민해서였다. 그 잡지를 들고 내용을 조금 보고 있는데, 남성지 코너에 있던 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9금 잡지가 있는 곳이었고 그녀는 잡지를 하나 들고 보는 둥 마는 둥하고 있었다. 아까 훑어본 기사 중에 젊은 여자가 관심이 있는 게 있었나 잠시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남성지 옆의 잡지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가 자리를 떴다. 내가 옆에 와서 괜히 방해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흘끔 쳐다본 것 외에 의식적으로 여자 쪽을 보지 않았기에 별다른 혐의를 두긴 싫었다.


여자가 보던 게 뭐였을까 하는 호기심에, 여자가 섰던 자리에 서서 매대를 내려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까 눈을 빼앗겼던 맥심이 보이지 않았다. 그 옆의 다른 잡지들은 그대로였다. 맥심만 없었다. 그 사이 다 팔렸을 리는 없을 텐데 하며 다시 보니, 맥심의 자리에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떡 하니 놓여 있었다. 그 잡지를 들어보니 아래에 맥심이 뒤집어진 채 있었다. 표지모델이 없는 뒷표지가 보이는 상태로.


누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집어보다가 여기에 놨을 것 같진 않았다. 그 정도의 무감함, 무심함을 가졌다면 잡지를 대충 놓지, 옆의 잡지들에 가지런하게 두진 않았을 것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옆의 옆 섹션에 놓여 있었으니 더더욱. 거기에 아래에 있던 맥심 잡지는 일부러 뒤집힌 모습이었다. 누군가 맥심을 뒤집어 놓고, 그마저도 가리기 위해 다른 잡지로 가려놨다는 게 정당한 추리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전에 있었던 여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 그 자리를 떠났던 여자를 찾아 두리번댔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와 별 관계도 없는 해프닝이었지만, 굳이 맥심을 다른 책으로 숨겨놓은 그녀의 의도가 궁금했다.


여성 상품화를 반대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그러려면 옆의 잡지들까지 가려야 하지 않나)

옆에 놓여있던 경쟁 잡지사 직원일까? (아무리 회사에 충성심이 높아도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까)

표지모델과 앙숙관계인 누구일까? (그 시간에 차라리 악플을 다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표지모델의 스토커 전 남친? (그러면 잡지를 아예 다 사버렸겠지)

혹시...자기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난, 표지모델 본인? (전국에 깔리는 게 몇 권인데 굳이 여기서?)

19금 잡지를 들여놓길 반대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찬성 때문에 받아들였던 서점 직원 중 하나? (역시나, 옆의 다른 잡지들은 왜 안 건드리고? 거기에 책이 팔려야 이득일 텐데?)

책의 큐레이팅을 흐트러뜨리는 게 취미일까? (굳이 다른 책 수만 권 놔두고 이것만 할 필요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19금 남성잡지만큼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진잡지 마니아? (사진은 나도 좋아하지만, 19금 남성잡지를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답을 해줄 여자는 없었다. 잠깐 본지라 그녀의 얼굴도 확실하지 않았고, 기억이 나서 여자를 다른 섹션에서 발견한다한들 "실례지만, 아까 맥심을 감춘 이유가 뭐죠?"라고 묻는 것도 이상했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면, 나만 맥심의 표지에 집착하는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의문을 상상으로 채우는 수밖에.


잡지 코너를 떠나면서 원상태로 돌려놔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만인에게 호의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표지모델의 얼굴이 아무래도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원색보단 나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았다. '내셔널지오그래피컬 맥심'이라는 비정상은 서점 직원이 얼마 뒤 되돌려놓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의도 따위에는 하등의 의문도 품지 않으면서. 그리고 맥심을 숨겼던 그녀는 서점을 나가 어느 구석의 카페에서 자신의 기묘한 전복(顚覆)을 자축했을지도 모른다. '카페라틱 소다'나 '카라멜 마키아틱 스무디'를 주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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