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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06. 2020

권태가 통증의 형태로 온 거야

을지로의 한 루프탑. 오십 중반의 상사가 말했다.


"새로운 통증이 온 거야. 이 나이에."


그는 평생 골프는 배우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었고, 온갖 등산 코스와 비박 장소를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근육을 키우는 데 몰두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뱃살이 나오도록 스스로를 방치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호통을 치기보다는 회의실에 둘이 앉아 자초지종을 조용히 물어보는 사람이었고, 강제적인 전체 회식 대신 비공식적인 소규모 술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이 직업을 가진 채 늙어갈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뭔가를 떠올리는 걸 즐겼고, 그 단초를 기획으로 발전시키는 걸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잔에 담긴 하이볼이 각기 다른 속도로 희석되고 있었고, 걷지 않은 파라솔이 단색의 밤하늘에 우산 모양의 섬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통증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무뎌. 어떤 새끼가 뭐라 하든."



4층 아래의 도로에서는 차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고, 눈에 보이는 고층의 건물엔 불규칙한 빈도로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야근할 때만이라도 사무실의 조명을 오렌지 색의 백열등으로 바꾸고 조도를 절반 아래로 떨어뜨리면 좋을 텐데. 저 하얀빛 아래에서, 누가 뭔가를 의욕할 수 있을까.


"권태가 통증의 형태로 온 거야."


괴롭다기보다는 쓸쓸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통증은 아프다기보다 성가신 것일지도 모른다. 극적인 통각 대신 꾸준히 어느 구석의 신경을 건드리는 그런. 권태가 뒤덮은 시간 속에서 그의 몸 일부분이 고무처럼 변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재질지만 눌러도 딱히 감각이 없는 그런.



불투명한 하얀색이어서 내용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고개를 내밀어야 알 수 있는 술잔을 앞에 두고, 나는 그가 권태라는 불쾌한 세계로 들어선 이유를 생각해 봤다.


 (당연히) 간부로서의 그의 일상을 내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역시나 당연히) 사무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충 아는 터였다. 그가 권태의 영역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몇 개의 사건과 그에게 지루한 침묵을 의도하는 듯한 몇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뭔가의 기준으로 '나이'를 갖다대는 걸 즐기진 않지만, 자신이 무뎌지고 있음을 깨진 활석 같은 단어로 말하는 상사를 보며 굳이 그의 나이를 끌어다.


오십 중반. 밥벌이의 형태로 일을 시작한 지 30년 가까이일 테고, 앞으로도 긴 시간 가정은 별다른 사건 없이 유지될 것이었다. 일이 생겨나고 마무리되는 다양한 형태를 경험으로 터득한 나이였고, 이변이 없는 한 자신이 해 오던 방식을 굳이 바꾸지는 않을 나이였다. 현(絃)보다는 활로서 움직이는 걸 선호할 나이였고 실제로도 그는 그랬다.  



그런 그가 말하는 권태는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형태의 무엇'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신경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 건, 권태 자체가 아니라 권태라는 형태의 자기 회의가 아닐까. 강요된 지루함 속에서 사그라들지 않는 의욕을 누르면서 '자기 자신에게 탓을 돌리는' 건 아닐까.


루프탑에서 내려온 후 몇 명이 집으로 가고 나서 상사는 '죽이는 데서 소주 세 잔씩만 더 먹자'고 했고, 우리는 옆 건물의 순댓국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주가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세 잔씩을 비우고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났다. 권태롭지 않은 마무리였다.


통증의 형태로 찾아온 권태를 단칼에 없앨 방법을 그는 찾지 못할 것이다. 상사의 나이를 살아보지 않은 나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통증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한, 술자리에서의 자기 고백으로 간헐적인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그의 나이가 돼 밀물처럼 밀려오는 따분함에 직면하면 을지로 루프탑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주 세 잔씩만 더 먹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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