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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08. 2020

호의와 예의에서 한 발 물러나기

#말석본능(末席本能)에 대하여

나한텐 말석본능(末席本能) 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건 아닌 곳에서건 눈에 띄지 않은 끝 자리를 찾아간다. 첫 만남, 그것도 내가 꼭 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닌 경우에 이 본능은 더더욱 기승을 부린다. 천성적으로 낯선 사람 앞에서 수줍어하고 만남의 시작을 어색해한다. 그래서 늘 (꽤 필사적으로) 외진 곳을 찾고, (꽤 간절하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란다. (수십 년째)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하게 되는 그런, 非파티적, 非사교적인 성향.


본능은 나의 용량 때문이다. 내가 하루에 처리 가능한 정보의 양은 한정돼 있다. (물리적, 과학적, 의학적인 기준과는 별개로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래서 수용 가능량을 넘어선 자극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는 늘 긴장한다.


꼭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를 못 받아들이면 어쩌지.

다른 사람과의 평범한 친교거절하게 되는 건 아닐까.

영영 사람들과 못 어울리는 사람이 돼 버리는 건 아닐까.

남들 하는 만큼의 대화라도 해야 할 텐데 말이 잘 안 나오면 어쩌지.

나의 긴장으로 인해 자리 전체가 어색해지면 어쩌지.


그렇게 걱정이 걱정을 만는 악순환.



며칠 전, 예상치 못한 모임에 갔다.


엄마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결국 생판 남이었던 분)의 에서 있었던 식사 자리였다. 나는 엄마와 엄마의 지인이 '편하게 가도 되는 자리'라고 해서 운전기사 겸 따라간 자리였고, '마당에서 미니 음악회를 여는 것'이라고 해서 잠시 뒤에 서 있다가 오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집주인 내외와 그분의 친구들 내외와 지인들이 모인 식사 겸 술자리였다. 참석자들의 나이는 주로 '58년 개띠'였고, 다들 자주 모인 듯 친해 보이는 자리였다. 새로 지은 집을 구경하고 술과 음식이 돌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뭔가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갈 구실도 방법도 없었다. 꼼짝없이 몇 시간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처음의 걱정과 달리, 나보다 연배가 높은 이들의 점잖은 수다는 편했다. 분명히 쉬이 지칠 법한 상황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왜 편하게 느꼈을까?


우선, 여느 술자리에서 듣던 뻔한 자기 자랑이나 클리셰적인 대화 내용이 없었다. 부동산에서 음악으로, 음악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지인으로, 지인에서 직업, 직업에서 정치로 대화 주제가 옮겨 다녔다. 나나 새로 온 다른 이들에 대한 형식적인 호구조사는 없었고 자기 얘기만 이어가려는 고집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의 정보 수용 용량이 오버된 순간, 긴장을 풀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든 것을 수용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이 사람들과 반드시 친해져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이. 모든 대화를 따라가지 않고 내 마음에 들어오는 인상적인 장면만 기억하면 된다는 무책임한 태도로, 과도하게 예의 차릴 필요 없이 간헐적인 친교만 의도해도 된다는 자세로.


그런 헐렁한 마음가짐 덕분에, 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말석에 느긋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간 낯선 자리에서 느꼈던 긴장은 나의 욕심과 관계가 있지 싶다.


새로운 것과 새로운 사람최대한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 그런 태도를 보여야 나에 대한 평가가 높을 거라는 기대. 단순하게 말하면,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인정 욕구.


새로운 것, 새로운 사람을 '내가 판단'하는데, '나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준'을 끌어들이는 셈이다. 그게 제대로 작동할 경우, 그 호의라고도 하고 예의라고도 한다. 나는 늘 호의 넘치는 사람, 예의 바른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 이런 욕심 때문에 낯선 사람과 새로운 상황을 버거워하게 된 건 아닐까. 그 욕심을 버릴 순 없고, 제한된 나의 수용 능력을 키울 순 없으니 구석 자리에 앉아 상황이 얼른 비껴가기만을 원한 게 아닐까.



결국, 호의와 예의에서 한 발 물러나면 될 일이다.


우리가 과분한 신경을 쏟느라 스스로 긴장한다면 아무것도 편하게 바라볼 수 없다. 조금 덜 호의적으로 보일지라도 조금 덜 예의를 차릴지라도, 느긋하게 있는 게 우리를 마주하는 사람들에게도 편할 것이다.


물론, 단번에 바꿀 생각은 없다. (그럴 만한 결단력이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난 말석을 찾기 위해 눈을 여기저기 돌릴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덜 필사적이어도 된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끝 자리가 아니더라도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낯선 누군가를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보일 수 있는 만큼의 호의와 예의 갖춘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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