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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21. 2020

모욕의 한가운데에 서서

영화 [ 그린 북 (Green Book) ] 2018년

깊이 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 한다.

하지만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 에세이 「벤투의 스케치북」 中, 존 버거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알고 봐도 재밌겠지만...


내용은 이렇다.


"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는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 셜리는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기간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흑인 여행자를 위한 여행안내서 ‘그린 북’에 의존해 특별한 남부 투어를 시작하는데…"(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3948#none)



이탈리아 계 토니는 집수리를 하러 온 흑인 노동자가 마신 유리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그 시대의 평범한 인종 차별' 인식을 가진 백인이다. 그는 클럽의 기도로 일하다 실직한 후,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의 운전기사로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본다.


펜트하우스에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뻔한 긴장'이 흐른다. 토니는 자신의 고용주가 부유한 흑인이라는 점에 놀라고, 셜리 박사는 백인이 으레 갖고 있는 인종차별 의식의 정도를 가늠하려 한다. 이 백인의 생각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인가. 관객은 여기서, 미국 상류 사회에서 셜리 박사가 평생 모욕을 견디면서 터득했을 무표정을 처음 접한다. 그는 일부러 단을 높게 하고 왕의 의자처럼 꾸민 곳에 앉아 토니를 내려다보며 질문한다. 그는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그 예의가 '방어'임을 관객들은 알 수 있다.


각자의 긴장을 간직한 채, 둘은 8주간 '흑인이 돌아다니기에 매우 위험한' 미국의 남부 지역으로 공연 투어를 떠난다.

 


무대 위의 돈 셜리 박사는 나무랄 데 없이 연주하고 나무랄 데 없이 대접받는다.


그는 천재적인 연주를 선보이며 죄다 백인으로 채워진 객석을 향해 밝은 웃음을 보인다. 늘 정돈된 의상에,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만을 고집하는 그에게서 빈틈은 보이지 않는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를 백인 관객들은 '돈 셜리 트리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셜리 박사는 꼿꼿하게 서서 여유롭게 인사한다.



하지만, 무대와 무대 사이 세상은 다르다.


토니가  '흑인이 묵을 수 있는 안전한 숙소' 등이 표시된 '그린 북'을 보며 그를 안내하지만, 인종 차별이 심한 남부는 흑인인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는 양복점에서 옷을 입어보는 것을 거부당하고, 경찰의 검문에서 깜둥이란 말을 듣는다. 심지어 그를 '귀빈'으로 초대한 파티에서조차 그는 건물 안의 화장실 대신 마당의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백인 상류층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즐거움을 위해 그의 연주를 소비하지만,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셜리 박사는 이 모든 모욕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리고 모욕의 매 순간 품위를 지키려 노력한다.

 

애초에 그는 상대적으로 흑인에 호의적인 북부의 편한 공연 대신 남부 투어를 선택했다. 그는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이 바뀔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모든 차별의 순간에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진 않는다. 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오랜 세월 쓰인 차별의 역사가 한순간에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는 믿고 있다. 자신이 이 거리를 당당하게 다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제로 백인들은 그를 발견하고 관찰한다. 그는 응시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투어를 이어나간다.



두 사람이 계약을 할 때, 셜리 박사는 토니에게 매일 밤 숙소에 '커티 삭' 한 병씩을 가져다 놔야 한다고 말한다. 안전한 숙소 안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그는 긴장을 푼다. 하지만,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그의 표정은 늘 어둡다. 같이 공연을 하는 트리오의 나머지, 러시아 계 백인 두 명은 자유롭게 술집을 다니고 여자를 만나지만 그는 다르다. 그는 뉴욕의 펜트하우스에서건, 투어를 떠나 온 지금의 숙소에서건 혼자다.


토니는 발코니에 앉아 쓸쓸히 술을 마시는 그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투어의 초반, 토니는 백인인 자신이 평생 경험하지 못한 차별을 접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몇 걸음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이 쌓이면서 토니는 변한다.


백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경찰한테 알몸으로 잡혀있는 셜리 박사를 어떻게든 구해낸다. 그는 투어를 모두 마쳐야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대지만, '보다 더 현실적인' 인종 차별이 잘못이라는 걸 점차 온몸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셜리 박사가 참아내는 일상적인 모욕에조차 나서서 항의할 정도로.



영화의 후반부,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있는 도시에서 셜리 박사는 참지 못할 모욕을 당한다.


1년 중 가장 큰 행사라는 크리스마스 공연의 주빈이었음에도 그가 안내된 대기실은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식당의 창고다. 그리고 공연 전 식사를 위해 호텔의 식당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제지당한다. '규칙 상' 흑인은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메뉴를 주문하면 대기실로 가져다주겠다는 지배인의 말에 그는 간명하게 대답한다. "NO"


하지만, 백인인 자신에게 돈을 쥐어주며 '흑인을 무대에 세우라'는 지배인에게 토니는 완력을 휘두르려 하고, 셜리 박사는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니는 참지 않는다. 그는 악다구니를 쓰는 지배인과, 식당의 손님이자 그날 공연의 관객인 백인들을 뒤로하고 셜리 박사를 데리고 나온다. 그런 그의 옆에서 셜리 박사는 밝게 웃는다.



그렇게 나온 두 사람은 길 건너 흑인들이 주로 가는 바에 들어가고, 셜리 박사가 피아니스트라는 걸 알게 된 바텐더가 '그럼 한 번 보여달라'라고 하자, 술집의 무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흑인인 자신이 클래식 음악을 하면서 끊임없이 '전향'을 권유받았던 재즈 음악을 신나게 연주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두 달간의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간다.



낯선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모욕 앞에서 긴장한 셜리 박사를 보며 관객들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 용기를 찾아 나선 그는 모욕의 중심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뒤돌아 도망치지 않고 온갖 언사와 물리적 폭력으로 다가오는 차별이라는 현실에 자신의 언어로 대응한다. 셜리 박사는 현실을 견딤으로써,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나에게 가해졌던 모욕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던 모욕을 제외하고도, 몇 번의 경험이 있다. 과민한 타입은 아니나 말과 행동이 무심코 드러내는 의미에 무딘 편도 아니기에, 내가 잘못 느꼈던 건 아닐 것이다. 모욕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의도와 별개로 상황은 나를 덮쳐왔었다. 어쩌면 나의 경험은 '부하직원', '윗사람' 같은 단어에 익숙한 대한민국 직장인에게는 일상적일지도 모른다.


그 모욕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복기한다. 가해의 말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나의 초라한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영화 속 셜리 박사처럼 꼿꼿하거나, 토니처럼 거침없는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명쾌하지 않은 이유 앞에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웃어버린 적이 많다. 하지만, 어쩌면 둥글다는 건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전체적으로 때가 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각이 진 정육면체는 땅에 떨어져도 한 면에만 흙이 묻을 텐데......


세상과 불화할 필요는 없지만, 희미한 각(角) 몇 개 새기면서 살아도 괜찮겠지 싶다. 언젠가 나 자신을 돌아볼 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깨끗한 면 한두 개 정도는 있어야 편하게 웃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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