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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24. 2020

슈츠와 미생 사이

#두 드라마가 드러내는 것들에 대하여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의 휴대폰을 사 줬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줬다. 첫 월급으로 사 온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에세이 '무사한 나날들' 中, 김훈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미생'을 다시 보, 미국 드라마 '슈츠'가 연관 콘텐츠로 뜬다. 직장, 신입사원 등 여러 연관 코드가 있어서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이 추천을 했나 싶다. 하지만, 이 똑똑한 시스템이 과연 슈츠와 미생 사이의 간극을 알고 있을까.


두 드라마를 같이 놓고 봤을 때, 의도치 않게 드러나는 것들에 대해.



*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90도 인사


미생의 주인공들에게 '90도 인사'는 일상이다.


상사와 부하직원의 하모니 속에서 조직이 안정되게 굴러간다는 익숙한 설정이다. 장그래는 김동식 대리와 오상식 차장에게, 오 차장은 김 부장과 최 전무에게, 최 전무는 사장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인다. "직장인한테 월급하고 승진 빼면 뭐가 남냐"라는 대사는 이런 '충성스런 인사'를 하는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조직 안에서 인사를 받는 사람은 인사하는 사람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건 권한이라 불리기도 하고, 권력이라 부르기도 한다.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평가해 상과 벌을 주는 힘을 갖고 있기에, 아랫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고개를 숙인다.


얼핏, 이런 수직적 관계가 보기에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편한 관계다. 위에서 주는 게 있다는 건 아래에서 얻을 게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주고받는 그 행위가 형평성에 맞냐는 것이다. 누군가 부당한 충성을 매개로 부당한 이익을 편취하진 않는가 하는 의심은 늘 있다. 그러나 나의 노력을 조직이라는 시스템에서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생각이 들면, 90도로 숙이는 행위는 모욕보다 존중이나 예의에서 나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반면, 슈츠의 모든 관계는 '꼿꼿한 악수'로 시작한다.


상사와 직원의 관계도, 비서와 변호사의 관계도, 의뢰인과 변호사의 관계도 모두 악수로 시작한다. 이건 단순히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인사의 방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슈츠에서 그리는 조직은 '철저하게 계산이 전제된' 시스템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끈끈하다는 이유로' 뭘 그냥 주지는 않겠다는 (반대로 당연히 나도 뭔가를 눙치며 바라지 않겠다는), 같이 구르면서 쌓인 인간관계로 서로를 이유 없이 봐주지 않겠다는 그런 관계이기에, 굳이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직과 나, 그리고 조직 내의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는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다. 합당한 가치를 주고받는다는 '거래'라는 단어의 의미에 부합하는 그런 관계이다.  



* 누가 결정하는가


'슈츠'에서는 '누가 결정하느냐'보다 '무엇으로 평가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 드라마에서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다. 돈이다. 대형 로펌에 들어간 신입 변호사(물론 처음에는 변호사인 척 사기를 치는 인물이지만)의 목표는 소송에서 이기는 것 하나다. 이는 법조계라는 특수성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절대적인 법 조항과, 법의 명쾌한 해석을 통해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결정되는 구조에서 이기는 논리는 유일한 무기다. 파트너 변호사건 그냥 변호사건, 신참이건 상관없다. 돈을 벌게 하는 논리를 내놓는 사람에게 모두가 수긍한다. (돈이라는 유일한 평가 기준이 정당한가 와는 별개로) 개인의 평가를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셈이다.


반면, 미생에서는 결정권자가 중요하다.


미생의 회사에서 결정권자는 조직 상부의 누군가 들이다. 문제는 이 누군가들과 당사자의 관계에 따라 결정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 오 차장을 탐탁지 않게 하는 마 부장은 정당한 의견을 묵살하고, 보스 기질이 있는 최 전무는 오 차장이 명시적으로 충성을 보여주길 원한다. 장그래 이외의 다른 신입사원들의 이른바 '사수'와 '팀장'들의 성향도 제각각이다. 그로 인해 능력과는 무관하게 고민이 쌓여간다. 그런 관계에서 개인은 논리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윗사람들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정당한 의견을 포기하기도 해야 한다.


"기존의 판이 흔들리는 걸 본 후, 나 역시 판 위에 있음을 새삼 자각했다.

그리고 의심에 빠졌다. 하찮은 나로 순식간에 돌아왔다."


전 임원 앞에서 오 차장이 '요르단 중고차 사업' PT를 시작할 때 긴장 가득한 장그래가 말한다. 판 위의 개인은 촘촘한 결정권자의 그물 안에서 매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기준에 맞추게 된다.


미생에서는 최종 결정권자인 사장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그는 비리를 밝혀낸 영업 3팀에 금일봉을 하사하고 오 차장을 전격적으로 승진시킨다. 최 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요르단 중고차 사업 프레젠테이션에도 예고 없이 방문해서, 프로젝트 진행을 승인하고 흡족하게 떠난다. 드라마에서 사장은 '시청자가 원하는 결정'을 해주는 호인이다.


하지만 호의적인 사장의 얼굴은 보기 불편하다. 개인의 노력을 '우연히 보고', 개인의 가치를 '전격적으로 판단하는' 방식이 정당할까. 정당한 과정을 통해 자신을 인정받아야 하고, 자신의 프로젝트를 용인받아야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어쩌다 들르는 인상 좋은 사장'보다는, 하루하루의 노력과 성과를 제대로 판단해주는 시스템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 천재와 둔재, 태생적으로 다른 기대에 대하여


'슈츠'와 '미생'은 각각 마이크 로스와 장그래가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반대 되는 캐릭터로 인해 이야기에 몰입하는 우리의 시선은 정반대다.


'슈츠'의 주인공 마이크 로스는, 뭐든 한 번 읽으면 기억하는 천재형 인간이다.  


모든 에피소드는 마이크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말하자면 '슈츠'는 주인공이 천재여서 성립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크의 천재성은 매우 개인적이다. 그는 앞서 말한 '개인이 개인으로 평가되는 조직' 안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거리낌 없이 내보인다. 시청자들은 그가 뛰어난 개인기로 하나씩 성취하는 걸 응원한다.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가 천재를 동경하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조직에 짓눌리고 싶지 않은 개인이기에, 이 기대는 가볍지 않다.


 '미생'은 주인공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특히 사회적인 태생이.


장그래는 직장인이 되는 평범한 과정, 그러니까 대학 입시와 스펙 쌓기, 어학연수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바둑에 매진했지만 프로기사로 성공하지 못하고 아무런 경력도 없이 20대 중반에 덩그러니 사회에 나왔다. 말하지만 '사회적인 둔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비정상적인 배경을 가진 장그래를 보는 시선은 처음부터 어딘가 모르게 틀어져 있다. 그건 드라마 속 다른 주인공들이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생'은 그런 장그래가 있어서 성립하는 드라마다.


장그래를 '어딘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는 건, 장그래 개인보다 장그래에게 찍혀 있는 낙인들 때문이다.


고졸이라는, 비정규직이라는, 20대라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판단이 그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다른 신입사원인 안영이, 장백기의 '명문대 출신 엘리트' 캐릭터는 장그래의 이런 처지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환기된다.  


시청자인 우리는 그런 장그래가 뛰어난 성취를 이루기보다, 그의 조건을 극복하길 원한다. 오 차장과 김 대리로 이루어진 따뜻한 팀이 왜소한 장그래를 보듬어주길 바란다. 업무성과를 내기 이전에, 극 중 주인공들과 시청자 모두가 가진, 뿌리 깊은 인식을 극복해주길 응원한다. 그리고 '미생'의 시즌 1은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장그래의 극복을 차곡차곡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둔재'가 주인공이 되는 게 흔치 않은 한국에서 꽤 인상 깊은 표정들이 장그래의 얼굴에서 드러나게 된다.



*집이라는 휴식 혹은 정거장


'미생'에서, 전쟁터인 사무실, 내 편끼리 속을 터놓는 술자리를 거쳐 당도한 집은 휴식의 장소라기보다는 책임의 대상으로 비친다.


적어도 시즌1의 에피소드에서 활용하는 오 차장, 천과장, 장그래의 집은 그렇다. 장그래는 매일 저녁 지친 몸으로 골목길을 터덜터덜 올라가고, 술에 취해 집에 온 오 차장은 냉장고를 열어 보리차를 병째 마신다. 천과장은 팀원들과 오해를 푼 술자리를 끝내고 집에 와서 혼맥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대로 들어간다. 이들의 집은 주로 밤에 머무는 곳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식구를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에 우리는 연민을 느낀다. 헝클어지고 취한 가장의 모습에서 풍기는 쓸쓸함, 우리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 편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정'이 활용된다.  


'슈츠'에서 집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주요 주인공들이 미혼이라는 점이 '미생'과 다른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연인과 같이 밤을 보내는 집은 그들에게 부담이라기보다는 휴식의 공간이다. 주인공에게 연인은 책임의 대상이 아니다. 부유한 생활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집이 족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기만족적인 생활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드라마에서 문득문득 누설되는 현실을 보며, 새삼 개인으로 꿋꿋하게 존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한다. 조직 안에서, 스스로의 의견을 갖는 것이, 그걸 내보이고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최대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최대한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갖는다. 하지만, 그 기준만으로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건 스스로 미생에 갇히는 일이 아닐까. 어떤 날은 박하더라도 어떤 날은 후하게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눈을 유지하는 게 이 사무실에서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끝없이 순환하는 이 진부한 일상에 무사히 안착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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