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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05. 2020

어둠과 적당히 타협하면

#인테리어 편

불 좀 켜라.

켰는데?

형광등.


고향에서 다니러 와서 이 집에서 주무실 때 엄마, 아빠의 불만은 늘 조명이었다. 늘 하던 대로 거실의 스탠드 등과 부엌의 작은 등만 켜놓으면 잔소리가 이어졌다. 집이 왜 이렇게 어둡니, 눈 나빠진다, 우울해진다...... 수년 째 이어진 실랑이는, 부모님이 주무시는 큰 방의 형광등을 환하게 켜고 부엌과 거실의 형광등을 필요할 때 켜는 것으로 타협하곤 했다. 물론 얼마 전까지도 모든 형광등을 켜 놓으려는 엄마의 시도가 이어지긴 했지만.


형광등을 도대체 왜 안 켜느냐는 질문에 답할 말은, 의외로 군색하다. 낭만적이니까? 밤이니까? 잠이 잘 오니까? 몇 개의 말을 고르다 늘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형광등은... 흠... 촌스러워.

 


이 집에는 큰 방, 작은 방, 거실, 부엌에 각각 1개씩 총 4개의 형광등이 있다. 오래된 집답게, 거실의 천장엔 정사각형의 커다란 나무 장식까지 있다. 차라리 기다란 일자형 옛날 형광등이면 나름 보는 재미는 있었을 텐데, 전에 살던 사람이 11자 형 삼파장 전구를 끼우는 멋대가리 없는 소켓으로 죄다 바꾸어 놓았다.

 

네 군데의 형광등은 거의 켜지 않는다.


물건을 찾거나, 여름에 숨어 들어온 모기를 찾거나 할 때를 빼고 형광등은 늘 꺼져 있다. 전구를 언제 갈았는지도 잊어버렸다. 심지어 작은 방의 형광등은 깜빡거린 지 2년이 넘었지만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작은 방에선 잠만 자니까 뭐.



대신, 주황색 전등을 켠다. 거실과 큰 방에 각각 14년 전 이 집에 이사올 때 산 스탠드가 하나씩 있고, 부엌에는 책 형태의 작은 오렌지색 LED 조명이 두 개 있다. 그 외에, 거실 구석 천장에 40w짜리 전구를 단 등 하나, 주방 레인지 후드에 달린 작은 전구 하나, 그리고 촛불 등이 이 집에서 켜는 조명이다.


집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현관 옆의 거실 등을 켜고, 다음으로 부엌의 등을 켠다.


작은 플라스틱 스위치가 내는 두 번의 탁, 소리가 내 하룻밤 휴식의 신호음이다. 두 개의 노란 불빛이 집을 낮게 채우면 온 몸의 긴장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축 처지기 싫거나, 위안이 필요한 날엔 큰 방과 부엌의 등을 하나씩 더 켠다.



이 집에서의 조명은 어둠과 적당히 타협한 듯한 밝기다.


쉬어야 할 것들이 쉴 수 있고, 최소한의 필요성이 담보된. 이 작은 불빛들로 어둠은 온건해진다. 밤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그 친숙한 어둠 속에서 나라는 기척은 가려진다. 낮 동안 스스로 어지럽히고, 누군가에 의해 흐트러져버린 '나'는 적당한 빛 아래에서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온다.


형광등 같이 밝은 빛 아래에선 도무지 편안하지 않다. 마치 빛에 수만 개의 눈이 있어서, 내가 그 앞에 온 몸이 발가벗겨져 관찰되는 느낌이 든다. 생각해보면, 저녁 술자리나 식사 자리를 선택할 때도 환한 곳을 피한다. 역시나 쓸모없이 드러나 있는 나의 기척을 가리기 위해서겠다. 적은 기척으로만 가능한 그날그날의 평화로운 마무리를 즐기기 위해서.



낮은 밝기의 불빛 아래에서는 웅크리고 있는 나 자신을 인식하지 않을 수 있다.


 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하룻 동안의 나의 동선을 차분히 짚어보게 된다. 그러면 어김없이, 낮 동안의 나의 무례가 떠오른다. 사람들, 상황들, 일들, 말들, 행동들... 요즘은 특히, 세상에 나에게 무례했던 것보다 내가 세상에 더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예의상 해야 할 말들과 표정들을 생략하고 최소한의 절차적인 기능만 하는 느낌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럴 때가 많다.


나는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 어쨌든 해치워야 하는 것들이 하루하루 지겹게 다가오는 것이.

 


몇 년 전, 전주의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저녁식사와 술자리를 거쳐 들어간 친구의 집은 어두웠다. 집에 들어와서 어떤 조명이라도 켤까 해서 기다렸는데, 친구는 '어두운 거 괜찮지? 조금 있으면 익숙해질 거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다행히 나만 어둠을 편애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집의 조도보다 낮은 조도에 금세 익숙해졌다. 이름을 처음 듣는 재즈 뮤지션의 연주가 흘렀던 걸로 기억한다. 도로 쪽으로 반쯤 열린 창으로 차들이 불규칙하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억한다.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어느 작가의 자화상이 걸렸다고 기억한다. 한참 뒤 켰던 촛불 하나가 비현실적으로 일렁이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때, 어둠은 조력을 했던가 안 했던가.



작은 전구 몇 개가 만들어주는 이 불빛은, 술에 취해 들어온 많은 날 취기에 휘청대는 나를 품어주는 빛이었고

누군가를 뭔가를 피해 얼른 집으로 들어온 날엔 내 마음의 잔떨림을 잡아주는 빛이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밤으로 스며드는 시간이라면, 적당히 어두운 조명만큼 집에 어울리는 게 없다.


오래된 노란 조명들 덕분에, 이 집의 어디에 누워도 눈에 여지가 있다.


더 정확히는 눈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건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아득한 어둠과 다르다. 적당히 어두운 이 공간의 어디를 쳐다봐도 나만을 위한, 익숙한 것들이 나를 지켜준다는 안온함이 있다. 그 안온함 사이의 넉넉한 여지로, 생각이 떠오르고, 얼굴이 떠오르고, 말이 떠오른다. 굳이 여지를 채우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떠오른 걸 그냥 떠나보내도 괜찮다.


나의 여지를 거쳐간 것들은 전등갓에 쌓인 먼지 같이 아주 천천히 내 안에 가라앉을 것이다. 이 따뜻한 전등이 무심하게 흘려보낸 빛이 아침이면 다시 전구 안으로 들어가 밤을 기다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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