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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30. 2020

다들 외로워져 버리면 그땐 어쩌지

#일요일 편

흔들리는 배처럼


기억이 나서


돌아 나오는 어둠


-시 '초점' 중, 유이우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창비, 2019년)





주말 오후야.

'이렇게까지 잠을 잘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돼 버렸네.'라고 혼잣말을 할 즈음의 시간.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주위는 아직 환한, 그래서 찬란함은 찾을 수 없는 그런 시간.

오전에 했던 빨래는 다 말랐어. 마른 바지의 주름을 손으로 쓸어보고 만족해.

볕 좋은 주말의 오후에만 느낄 수 있는 뻣뻣함.



망상망상하지 않고 길게 잤어, 꿈은 잦았지만.

밤의 초원에 있다가, 깊이가 없는 지하실로 갔다가,

바다가 보이지 않는 크루즈를 탔다가, 형광등 가득한 누군가의 입 속에서 잠에서 깼지.

 

소파에 걸터앉아 습관처럼 우울하다고 생각하다가 거부감이 들었어.

'우울함'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쉽게 긍정해도 되는 걸까.


그 단어를 쓰레기통 삼아 규정하기 애매한 기분을 쓸어 넣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 애초에 선명해질 수 없는 우울함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치밀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뭉친 왼쪽 어깨 근육을 매만지면서, 이 단어를 홀대해볼까 생각 중이야.

아껴 써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동안 과한 대접을 받기도 했으니 뭐.

우울하다,를 대체할 단어들을 잘하면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


처진다. 가라앉는다. 멜랑콜리하다. 침울하다.  

즐겁지 않다. 가뿐하지 않다. 의욕이 없다.

생각의 정지. 움직임의 둔화. 말수의 적어짐.

찐득한 액체로 가득한 머리. 절정을 잃어버린 안면근육.



저녁이 지나 공기의 밀도가 옅어지고, 텁텁한 공기가 바람에 밀려갈 때면

몇 개의 단어와 표현이 더 생각날 거야.

 

그러면, 주말 오후의 우울함도 아예 사라지겠지. 밤이 마련해 놓은 새로운 맹지로.

밤의 골목에서, 나와 비슷한 이유로 우울을 잊어버린 사람들 사이를 산책할 수 있을 거야.



근데 말이야.


밤이 지나고 다시 소파에서 잠이 깰 때,

이제 우울을 잃어버렸다는 알게 되면 어쩌지.


그렇게, 다들 외로워져 버리면 그땐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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