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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r 20. 2020

과거는 밤 속에서 횡행하고

#회상 편

살아 있는 자들은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진다.

마지막 무개화차가 지나간다.


-詩 ' 마지막 무개화차' 中 (허연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내내 시간을 허비했던 걸까,

시간을 버리며 받은 위안으로 살아왔던 걸까, 를 고민하는 밤이었다.


현재도 소중하고 과거도 소중하다, 라거나

현재의 과거만큼, 과거의 현재도 소중하다, 라는 문장을 끄적였다.  

다행히 겨울 추위는 가신 밤이었고, 촛불은 소리 없이 표준 연소시간을 지키며 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절(分節)이 필요했다.


 

책상의 오른쪽 벽에 아무렇게나 붙여 둔 사진들이, 여전히 아무렇게나 붙어 있다.

유리나 아크릴은커녕, 붙인 이후로 한 번도 닦지 않아서 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투명 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여놔서 이 모서리, 저 모서리 말려 올라가고 있는 꼴이지만,

낮은 조도의 조명에도 색이 바래고 있지만,


사진들은 각자의 사각(四角)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다.

프레임 속에 박제된 과거는 생생하고, 그 덕분에 벽은 여러 개의 창(窓)을 갖게 되었다.



창 밖으로, 여러 장소가 이어진다.


풀어놓은 동네 개들과 기싸움을 던 임실의 어느 시골 길,

바쁜 아버지가 주도해서 갔던 마카오의 성당,

지금은 재개발돼서 없어진, 네 멋대로 해라 고복수 네 가는 언덕길,

희한하게 사람이 적었던 하동의 신장개업 국숫집,

허벅지, 라는 단어 하나로 둘이서 자지러지게 웃었던 일본의 덮밥집,

여름 해바라기를 몇 대 피워 올렸던 제주 바닷가 마을,

걸을 때마다 맨발로 서늘함이 느껴지던 아잔타 석굴,

언제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언제 찍어도 설레는 공항 사진,

불법 영업차를 빌려 라싸로 들어가던 도로.



여러 시간이 흐른다.


횡단보도만 응시하며 건너던 취한 밤,

몇 개의 견과류를 담아놓고 음악을 듣던 술에 덜 취한 밤,

도서관 생활을 하던 복학생의 저녁,

가족 피서객들을 피해 걷던 여름의 해운대 모래사장,

옆 집 담벼락의 꽃이 탐스러워서 잠시 멈췄던 출근길,

누군가들과 누군가의 집에서 자고 지하철로 돌아오던 새벽.



낡은 벽에 즐비한, 지나쳐온 곳들과 지나온 시간들.

명확하지 않은 기대를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천천히 들어가 유영(游泳)할 수 있는 나의 과거들.


그렇게, 과거는 밤 속에서 횡행하고

침묵을 머리 맡으로 끌어 와 베고, 거실 바닥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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