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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24. 2020

골목이라는 기착지


아무도 지나가보지 않은 길은 골목이 될 수 없다.

골목은 길과 길 사이의 틈 같은 것이어서

길이 틈을 내주면 골목이 된다.


-에세이집 「레인보우 동경」中, 김경주-문봉섭





확성기 소리에 골목을 내려다본다.

1톤 트럭이 골목에 서 있다, 잠시. 멀리서 실어 온 교자상, 대나무발 등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녹음된 음성은 시끄럽지 않다. 전해야 할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전해진다. 아마 오랜 세월, 골목에 맞게 음량을 조절하지 않았을까.


봉지를 든 사람들이 걸어간다. 

약간의 오르막에서 속도는 빠르지 않다. 손에 든 봉지 안에는 약간의 음식 혹은 약간의 살림이 들었을 것이다. 사람도 봉지도 천천히 추 운동을 한다. 화분에 물을 주다 말고 사라진 사람들의 궤적을 바라본다. 손으로 쓸고 있는 화분의 잎사귀 같은 발걸음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골목의 맞은편에는 작업장 철문이 있다. 

봉제 관련 작업장인 듯, 두루마리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와 트럭이 드나든다. 소음은 거의 없다. 종종, 남자 몇이 번갈아 나와 담배를 피운다. 딱히 피곤해 보이지도, 딱히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뒷짐을 진 할머니가 내려온다. 

자주 본 얼굴이다. 늘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종종 큰소리로 욕을 한다. 다행히 대상은 없다. 늘 골목의 허공에 대고 말을 쏟아내곤 걸어간다. 언젠가 시비가 붙었는지 순찰차가 온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의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짐을 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 기억이 있다. 그때, 여자의 얼굴엔 난처함보다는 자기도 이해할 수 없다는 난감함이 떠 있었다.



남녀가 산책 중이다.

고양이가 남자의 어깨 위에 있다.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대고 있으니, 어디가 이상해서 들쳐업은 것은 아니다. 꽁지머리를 한 남자가 큰 손짓으로 뭔가를 얘기하고 있으나, 여자도 고양이도 별 신경은 쓰지 않는다. 산책이니까 셋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런 이유로 셋 모두 평화롭다.


밤, 택시가 종종 골목까지 들어온다.

대개는 30여 미터 위에 있는 너른 공간에서 차를 돌린다. 몇 년 전, 밤에 급하게 어디를 갈 일이 있어서 대문을 나서는데 더 위의 골목에서 택시가 내려와 잡아탄 적이 있다. 기사는 좁은 골목 끝까지 차를 타고 간 사람에 대해 한탄을 했다. 차를 돌릴 공간이 나오지 않는 곳에서 승객은 내려서 집으로 들어갔고, 기사는 차를 돌리다가 축대 위에 쇠 난간에 차를 긁었다고 했다. 이 낡은 골목의 암묵적 규범 같은 걸 나 몰라라 한 사람 같았기에 같이 화를 내줬다. 그리곤 떠났다.



잠시 머문다. 이 골목엔.


골목 위의 집으로 가든, 골목 아래로 볼 일을 보러 가든 서두르는 기색은 없다.

이 낡은 기착지는 모두의 중간에 위치한다. 특정한 시작도 명확한 끝도 갖지 않는다.

덕분에, 이곳을 흐르듯 걷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는 풍경 들은 누군가, 와 무언가, 가 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온 것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오래전 1층 대문에 있는 철제 우편함에 말벌이 집을 튼 적이 있었다. 에프킬러에 불을 붙여 벌집을 제거해준 119 대원은 고맙다는 나의 말에 이 동네에선 자주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골목을 걸어내려 갔다.  특별한 격식 없이 산에서 내려온 일군의 벌들은, 역시나 특별한 격식이 없는 방법으로 집을 잃었다.


하지만 동시에, 산에서 온 것들은 예의를 잊지 않는다. 

그건 산에서 배운 자존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새는 산에서 물고 온 소리를 내어놓고, 바람은 산에서 묻혀온 냄새를 남겨놓는다.

객으로서의 예의는 산뜻하다.



도시의 풍경을 오가는 사람들은 정반대다.

그들은 골목의 오래된 풍경 속에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그들은 눈치를 보지 않고 누군가와 속 얘기를 하고, 술에 취해 큰 소리로 통화를 하며, 담배 연기를 미련처럼 남기며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격식은 남아있다. 사람들은 골목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 집에서나 술집에서처럼 널브러지지도 않는다. 의도하진 않겠지만 그들은 골목을 어지르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골목은, 하나의 상태와 하나의  형태로 유지된다.


골목의 이런 평범한 모습에 기여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계절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골목을 찾아왔다가 떠나간다, 매일매일. 주저함이나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는 계절이 골목을 어제와 마찬가지로, 작년과 마찬가지로 만든다. 계절을 맞이하는 골목은, 그러니까 멀리서 온 봄바람이나 높은 대기에서 내려온 겨울 눈을 맞이하는 골목은 미루거나 예단하지 않는다.


계절은 보일 것 같 모습으로 오고, 사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간다.

우리가 골목에 적당량의 걸음을 남겨두듯, 

오가는 계절은 적당량의 추억을 흘려둔다.



낯선 새소리에 밖을 내다본다.


벌레를 입에 문 새 한 마리와 그렇지 못한 두 마리가 나란히 전선에 앉아있다. 낯선 종류다. 먼지가 낀 방충망과 얼룩이 잔뜩인 베란다 창을 사이에 둬서 더더욱 새의 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작은 몸집은 아니니, 다 큰 형제간이나 친구들 정도가 아닐까. 구름이 낀 오전, 새들은 전선에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이 골목 어느 하나 내가 개입하거나 기여하는 것이 없다. 골목은 자신의 시작이나 끝에 대해 알 리 없을 것이다. 결국 골목 역시 자신을 기착지로 여기고 잠시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날 듯한 기분을 감춘 채.


산책을 갈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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