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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14. 2020

이번 정류장은 뒷동산입니다

#서귀포행 521번 버스

"내려, 거기서! 만나서 얘기하자고!"


이 말을 열 번쯤 반복한 여자는, 잠시 뒤 "얘기 안 하자는 거지?"를 다섯 번쯤 말했다. 오후 5시 30분, 나를 포함 승객이 총 세 명인 버스에서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회사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채 버스 뒤쪽 출입문 맞은편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미 감정이 고조될 대로 고조된 그녀의 목소리는 상대방을 바로 앞에 두고 싸우는 것처럼 커져 있었다.



가뜩이나 흐린 날 진하게 선팅 된 버스 창 너머 풍경을 보는 재미가 덜했기에, 난 멀리 대각선에 있는 그녀가 하는 양을 몰래몰래 쳐다봤다. 그러나 관찰을 즐기던 나와 달리, 나머지 한 명의 승객인 남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꽤 큰 소리로 통화하는데도, 남자는 자기 손을 보거나 창밖으로 시선을 둘 뿐이었다. 운전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정도는 조용히 해달라고 말할 법도 한데 앞만 보고 천천히 운전만 했다. 말하자면,


'뭐 그럴 때도 있지', 분위기랄까.


여자는 주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주위는 그녀의 분출을 대충 용인해줬다. 저러면 속에 쌓아두거나 답답해하는 것도 없겠네. 종일 여름의 습기와 햇볕 아래 걷다가 지친 나로서는 이런 게 재밌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를 약 올리는 듯한 남자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그녀가 짠해 보이지도 독해 보이지도 않았다. 저 나이의 연애를 경험한 나로서는 그녀의 조급함이 얼른 해소되길 바랄 뿐이었다.



이 버스에 타기 전, 서귀포의 한 카페에서 걸어 나와 대포포구 정류장에서 15분여 기다렸다. 오는 길에 있던 무인 과일 판매대에 새끼 고양이 4마리만 놀고 있지 않았어도, 걔네들과 한 번 눈이라도 맞춰보겠다고 쭈그리고 앉지 않았어도 바로 전 버스를 탈 수 있었을 테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급할 게 없는 늦은 오후였고, 서귀포에 나가서 할 일이라고는 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조금 걷는 것뿐이었으니까.


"혼착밭 정류장입니다."


여자가 전화를 끊고 다시 버스에 고요가 찾아오자, 안내방송이 귀에 들어왔다. 흔히 듣던 식의 동네 이름이 아니어서 운전기사석 뒤에 붙은 화면을 쳐다봤다. 혼착밭, 이라는 묘한 지명이 쓰여 있었다. 밭이면 내가 아는 그 밭이겠지, 싶었지만 '혼착'이 뭔지는 알 턱이 없었다. 하필 휴대폰 배터리가 4%여서 검색하기도 애매했다. 서귀포 시내에 가기 전에 전화가 꺼지면 불안할 것 같아서 음악도 못 듣고 있었으니까.



다음 정류장 이름인 '허물서'까지 듣자 흥미가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이름들이 이렇게 스타일리시한가 싶었다. 버스 유리에 붙은 노선도를 찬찬히 봤다.


배튼개, 동병듸, 이천장물, 섯가름, 왕대왓, 서년듸, 고향모루, 서건도...


한글로 쓰인 걸 보지 않고 누군가 말하는 것만 듣는다면, 태국이아이슬란드의 어느 시골 지명들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이름들이었다. 이렇게 쿨한 이름을 가진 동네를 지나는 버스니까, 전화로 대거리를 하는 연인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나 싶었다. 그러다가, 이번 여행에서 들은 가장 낭만적인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번 정류장은 뒷동산입니다"


뒷동산에 사는 누구는 퇴근 중이었을 테고, 누구는 밥을 먹거나 술자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버스의 여자처럼 누구는 연인과 싸웠을 수도 있고, 이른 저녁에 사랑을 나누고 있었을 수도 있다. 뒷동산에도 모기와 날벌레가 날고, 매일 일정량술을 소비하는 동네 주정뱅이가 올 시간은 아니었기에 편의점 알바는 무료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그런 을 떠올렸다.



정류장 윗면에 적힌 '뒷동산'이라는 단어를 보자 묘하게 들떴다.


잠시 다녀가는 내가 어떻게든 풍경을 특별하게 보고 싶어서일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뒷동산에서 차를 타거나 내릴 때마다, 뭔가 하루의 묵은 피곤이 슬쩍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집이 뒷동산이라니.


물론, 나 혼자 미친놈처럼 버스 뒷자리에서 빙글빙글 웃었을 뿐, 나를 제외한 누구도 안내방송이나 창밖의 풍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마친 여자와 다른 승객들은 뒤에서 봐도 심드렁함이 느껴지는 자세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뒷동산을 지난 버스는 이후에도 공물, 주거물, 수모루, 여의물 같이,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이름의 정류장들을 거쳤다. 우연히 그중 한 곳에 내려 동네를 걷다가 어느 낡은 담장 너머로 들어가면, 내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세계로 쓱 들어갈 듯도 했다.


서귀포 시내에 내리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태풍이 온다던 예보와 다르게 얌전하게 내리는 비였다. 어쩌면 먼 하늘에서 내리던 비도 땅에 다다르기 전에 다른 세계로 쓱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쁘지 않은 제주에서의 휴가가 그렇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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