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너무 다른 역할 Jul 16. 2020

츄르 로맨스

#새벽 골목 고양이


5시 30분에 일어난 건 모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새벽 2시가 돼서야 자려고 누웠는데, 모기가 괴롭혔다. 거실 불을 켜고 작은 방문 틀에 있는 걸 거의 잡을 뻔했으나 모기는 방으로 들어갔다. 낙심하려다 번뜩 생각이 들어서 방문을 닫았다. 폐소공포증에나 걸려라 이놈. 만족하고 다시 거실에  이불에 누웠다. 열린 베란다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지만 -어쩌다 보니 요즘엔 거실 중앙에 둔 책상 옆 좁은 공간에 이불을 깔고 잔다 - 발치에 있는 선풍기를 틀었다. 혹시 다른 모기가 있으면 또 잠을 설칠 테니 아예 옆에 오지 못하도록. 하지만 선풍기 타이머가 꺼진 어느 순간 다시 모기 소리가 귀에 울렸다. 2호가 있었네. 잠에서 깨니 옆구리와 허벅지가 가려웠다.


몇 년 전에 어딘가에 치워뒀던 전자모기향이라도 꺼내야 하나 생각하던 , 베란다 너머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택들이 모여있는 이 골목에는 평소에도 고양이들이 자주 울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동체시력이나 가동해 모기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이어지는 울음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고양이를 키워보거나 고양이를 키우는 친한 친구가 있는 게 아니어서 울음소리로 뭔가를 판단할 능력은 없었는데도.


베란다에 나가 골목을 내려다보니 검은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리 집 1층 담벼락 위에 있는 치즈색 고양이한테 츄르를 먹여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살짝 높은 톤의 울음소리는 격렬하게 반갑다거나 엄청나게 맛있다는 의미겠군.


청년은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 있었다. 아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할 '한소리'를 차단하려고 이어폰을 꼈지만 고양이 울음소리는 들어야 하니 한쪽은 빼놓은 듯했다. 어쩌면 그는 음악 자체를 틀지 않았을 것이다.



모기 덕분에 잠도 달아났겠다 딱히 이 새벽에 할 일도 없겠다 카메라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2층로 내려가는 계단 담벼락에 새끼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1층에 있 고양이판박이였다. 가족이겠군. 새끼 고양이는 난데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웅크렸다. 넌 소심하구나 (나처럼). 뒷걸음으로 현관문을 반쯤 닫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료는 없으니 물하고 참치나 줄까 해서 캔을 따서 그릇에 조금 담아서 나오니 고양이는 사라졌다. 엄마 쪽으로 내려간 듯했다.



카메를 들고 현관 앞으로 나와서 아래 골목을 보니, 검은 옷의 고양이 청년이 오토바이 옆에 사료 그릇을 두고 조금 떨어져 앉아 있었다. 담벼락에 있던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 하나가 사료를 먹고 있었고, 청년은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 손에 츄르를, 다른 한 손엔 사료 그릇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꽤 익숙해 보였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새벽시간에 주로 동네 고양이들을 보살피는 듯했다.


모두 잘 시간에, 청년은 고양이들과 츄르 로맨스를 즐기고 있었구나.


사료를 먹는 모녀(혹은 모자) 고양이를 보는 그의 모습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꿀이 떨어지는 듯한 눈은 고양이들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자세를 고쳐 앉을 때도 조심스러웠다. 3층에 있던 나는 이들의 새벽 로맨스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사진 몇 장을 찍고 멀찍이서 감상했다.



청년의 등 뒤 그러니까 우리 집 1층의 담벼락 에 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있었다.


역시나 치즈 고양이였다. 같이 가서 사료 한 젓가락 뜨면 좋으련만 어느새 조심성을 획득한 그는 움직이지 않고 시선만 사료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퇴근길 골목에서 이 고양이 가족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새끼가 앉아있는 담벼락 쪽이었다. 옆 건축설계 사무실 건물과 우리 집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새끼 고양이들이 놀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불러봤지만 올리가 없었다. 바로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기 전에 내려다보니 다 같이 골목으로 나와 있었다. 그때는 분명 엄마 고양이와 새끼 3마리였는데...



한 마리도 근처에 있겠지 싶었다. 조심성이 많으니 뭐.


현관문을 닫고 들어왔다. 아까 딴 참치캔으로 비빔밥이나 해 먹을까 했다. 그런데 얼마 뒤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골목이나 1층은 아니고 바로 앞에서 우는 듯 소리였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울음소리가 매우 가까이에서 들렸다. 아래 골목에선 츄르 청년이 사료 그릇을 챙겨 다른 고양이를 찾으러 가고 있었고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 두 마리는 오토바이 쪽에 앉아 있었다. 계단을 조금 내려가 2층 현관 쪽을 봐도 고양이는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올라오는데 울음소리는 다시 들렸다.


뭔가 싶어 현관 앞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니 어미 고양이가 풀쩍 1층 담벼락으로 올라 계단으로 넘어왔다.나는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2층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보다가, 반쯤 올라온 어미 고양이와 눈 마주쳤다.  



뒷걸음질로 다시 집으로 들어가 아까 주려다가 못준 참치 그릇과 물그릇을 가져와 2층과 3층 중간 계단에 놓고 멀찍이 떨어졌다. 어미 고양이는 살짝 치켜뜬 눈으로 날 보더니 참치를 먹었다. 친한 사이였으면 '사료 방금 먹었잖아'라고 놀려도 될 법한 식성이었다. 하긴 세 마리 새끼 건사하는 게 쉽지 않겠지.


그런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어미 고양이와 내가 동시에 쳐다본 곳은, 2층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꺾이는 공간에 놓여있는 고무 다라이(몇 년 전 이사 온 아랫집에서 갖다 놓았는데, 도무지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와 그 위에 대충 닫아놓은 택배 박스였다. 혹시 새끼 고양이가 박스에 갇혔나 싶어 가서 열어보려는데 어미 고양이가 하악 소리를 내며 털을 세웠다. 잠깐 멈칫했는데, 생각해보니 일대일로 붙어도 내가 지진 않을 거고, 새끼 고양이가 갇혀 있으면 꺼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스를 열어도 고양이는 없었고 울음소리만 들렸다.



자세히 보니, 고무 다라이와 벽 사이에 새끼 고양이가 떨어져 있었다.


고무 다라이가 워낙에 모서리에 딱 붙어 있어서 공간이 좁아 고양이가 못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현관을 열고 나왔을 때 봤던 그 새끼 고양이지 싶었다. 나를 노려보는 어미 고양이를 경계하며 고무 다라이를 벽에서 조금 떼어놓고 얼른 현관으로 올라왔다. 어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지막 새끼 고양이 3호를 데리고 골목으로 내려갔다. 뭐 고맙다는 말은 어차피 못 할 테니까 괜찮아.



완전체가 된 고양이 가족이 오토바이 근처에서 뒹굴며 노는 걸 한참 구경했다.


간간히 다른 오토바이나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이 지나가면 모두가 귀를 세우고 경계를 하지만 그 외에는 편해 보였다. 한 마리는 소심하게 오토바이 위에 있었지만 나머지 두 마리 새끼는 어미 품으로 파고들다가 자기들끼리 놀다가 뒹굴었다.


집으로 들어온 나는 새벽부터 혼자 고양이 가족극장을 본 기분이어서 피식, 대며 참치 비빔밥을 만들었다. 열무김치를 자르고 냉동해놨던 깻잎무침을 해동해서 얹고 고양이한테 주고 남은 참치 반 캔을 넣었다. 참기름과 초고추장을 넣어 비빈 뒤 계란 프라이 2장을 해서 얹었다. 덕분에 거한 아침이네,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앙칼진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들은 주로 새벽에 공사다망 하네. 나가보니, 아까 사료를 먹던 오토바이 옆에서 어미 고양이와 다른 고양이 한 마리가 대치 중이었다. 밤 귀갓길에 종종 보던 고양이였다. 아무리 고양이 세계를 몰라도 저게 으르렁대는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새끼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담장 옆 좁은 틈으로 도망갔겠지 싶었다.


어미는 어쩌면 새끼들 쪽으로 다른 고양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이 동네에 먼저 살고 있던 다른 고양이의 영역을 뺏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쪽 편을 들기에는 애매했다. 방금 전에 새끼를 잠시 도와주고 참치를 줬다고 해서 내가 치즈 고양이네를 응원할 수는 없었다. 다른 고양이 역시 꽤 오래 이 동네에 살았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3층에서 인간의 말로 '싸우지 말고 거 잘 지내봐들'이라고 말해봐야, 알아들을 고양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그냥 서서 이 새벽 대결의 양상을 지켜보기로 했다. 흠... 결론은 어미 고양이의 패배였다. 처음부터 도망갈 듯 웅크리던 치즈 고양이는 토박이 고양이가 공격하는 동시에 골목 위쪽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다시 따라오자 이번엔 다른 골목 쪽으로 가서 나무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버렸다. 승자는 여유롭게 오토바이 쪽을 한 바퀴 돌고 천천히 걸어서 골목 아래로 사라졌다. 골목에 새소리만 남았다. 뭔가, 내가 굳이 안 느껴도 되는 비애 같은 게 잠시 떠올랐다.


로맨틱 멜로로 시작한 고양이 극장이, 인간극장을 거쳐 정글의 법칙으로 마무리되다니 이런......


잠시 뒤, 몇 년째 골목에 살고 있는 터줏대감 검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흡사 방금 전의 모든 일들을 전해 들은 양.



잠시 빈 골목을 보다가 들어와서 참치 비빔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비애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설거지를 마치고 혹시나 싶어 다시 현관을 나가 골목을 내려다보니, 1층 골목 쪽 담벼락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미나 다른 새끼는 보이지 않았다.


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아마 나머지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는 담벼락 옆 좁은 곳에 있을 것이고, 잠시 몸을 피한 어미는 금방 합류할 테니까. 누군가와의 경쟁이 골목의 법칙이라면, 가족애라는 강력한 힘도 또 다른 법칙일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과거는 밤 속에서 횡행하고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