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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16. 2020

있는 재료로만, 옥수수 수프

#주방 편

"당신의 가정은 당신의  작은 세계예요." 앨런은 이렇게 말하곤 했어.

"당신만의 영지예요. 그래서 가정은 당신이 자신의 삶을 사는 방식에 맞춰져야 하는 거예요.

주방은 그곳에서 요리하는 음식 형태, 실제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맞춰져야 하죠."


-소설 「도리스의 빨간수첩」 中, 소피아 룬드베리





이동경로가 많은 옥수수였다.

 

강원도나 경기도 어디쯤에서 자랐을 찰옥수수는,

서울에 있는 고모의 사무실 냉장고를 거쳐 우리 집 냉장고로 왔다.


몸이 안 좋아진 고모가 사무실 냉장고를 정리하는 걸 도울 때

'나 옥수수 별로 안 좋아해'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냉동실 있던 삶은 찰옥수수 두 묶음은 어느새 내 몫이 돼 있었다.


평소에 옥수수를 즐기는 타입도 아닌 데다가,

꽝꽝 언 옥수수를 다시 해동기도 귀찮아서,

옥수수는 꽤 오래 냉동실 구석에 있었다.

그러다 몇 달 전, 냉동실의 공간이 좁아 옥수수 알만 손으로 발라 통에 집어넣었다.


이후에 다양한 요리에 '굳이' 옥수수알을 넣으면서 '소진'을 시도했었다.


토마토소스-양파-대추-리조토 (그런 이름이 다른 곳에도 있겠지),

중국식 옥수수알 튀김 (설탕 맛으로 먹다가 결국 포기한),

카레 (인구 대국 인도에 옥수수 카레가 없는 이유를 알게 된),

훠궈 (웬만한 재료를 다 집어넣는 중국에서 옥수수가 훠궈 재료에 없는 건 이유가 있었다)

등등...

하지만 숱한 노력에도 냉동실에는 아직 옥수수가 남아있었다.  



이 찰옥수수와 끝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전조 없이 문득 든 생각이었다.


데워? 튀겨? 볶아? 삶아? 를 생각하다가, '갈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해동해도, 다시 삶아도 찰옥수수라 뻣뻣해서 별로니,

갈아버리면 먹기 편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옥수수 수프를 만들기로 한다.


구글을 검색해 레시피를 본다.

역시나 이번에도 없는 재료가 있다.

감자, 생크림, 우유.


감자는 탄수화물이라 살찌니까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생크림과 우유는, 두유로 대신하면 된다. 콩이니까 몸에 더 좋겠지.


있는 재료로만, 수프를 끓이면 된다.



일단 얼어있는 찰옥수수 알 덩어리를 삶는다.

간을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볶고, 갈고, 끓일 테니.


양파 한 덩이를 꺼내 자른다.

힘들고 성가시게 다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볶고, 갈고, 끓일 테니.



팬에 버터를 한 숟가락 넣는다.

레시피에 버터의 양은 안 나왔으니,

기왕이면 맛있어지라는 식으로 최대한 듬뿍.


버터와 옥수수와 양파를 볶는다.


집 전체에 '나 요리해요' 느낌의 향이 퍼진다.



미니 믹서기를 꺼낸다.

대학교 앞에서 자취할 때 산 믹서기는, 20년이 넘게 고장이 나지 않는다.  


작은 통 안에 볶은 걸 옮겨 담고 두유를 붓는다.

통 전체를 흔들면서 믹서기로 간다.


따라보니 되직한 콩국 같은 느낌이 난다.

양이 많아 한 번 더 반복하니, 냄비 가득이다.

끓이다 넘칠 게 분명해, 큰 팬으로 옮긴다.



남은 두유를 넣고 끓인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양이 '한 냄비'가 되었다.

몇 끼를 먹어야 하나... 는 일단 생각하지 않고 끓인다.


소금과 후추를 눈대중으로 넣는다.

후추향이 더해지니 향은 더 고소해진다.



뭔가, 너무 심플하게 요리가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에,

양념통이 있는 곳을 보다가, 몇 년 전에 핀란드 출장 때 사온 양념을 꺼낸다.

'스칸디나비안 포레스트'.

허브와 버섯, 당근 등이 갈려 있는 양념이다.

시간이 남아서 핀란드 마트에서 대충 집어왔던 건데, 왠지 수프에 어울릴 것 같다.


되도록 많이, 갈아 넣는다.

향이 더 다양해진다.



얼마나 오래 끓여야 하는지는, 레시피에 없다.


하긴 있을 리가 없다. 모든 주방의 상황은 다를 테니.

어릴 때 봤던 만화 스머프에서 가가멜이 끓이던 수프를 기억해내,

몽글몽글 기포가 올라와 터질 때까지 끓이기로 한다.

어쩌면 가가멜도 그저 고양이와 살며

수프를 끓여먹던 평화로운 비혼주의 남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닥에 눌지 않도록 수프를 젓는다.


저을수록 향이 묵직해지는 듯하다.

 

수프 하나로 풍경 전부가 고소해지는 기분이다.  



국그릇에 반이 넘게 수프를 담는다.

남아있던 바게트 반쪽을 준비해, 드디어 먹는다.

묽기가 살짝 되지 싶지만,

맛은, 뭐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맛있다.


냉동실을 비우려고, 묵힌 재료를 소진하려고 시도한 요리치고는 꽤 괜찮았다.

이 낡은 주방에서 수프란, 늘 끓인 물을 붓고 1분간 젓는 즉석 수프가 다였어서 더더욱.


언젠가, '눈대중으로의 레시피'나 '있는 재료로만'의 요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만의 주방을 유지할 것이다.


그건, 이 낡은 집의 주방이 비좁고 별 볼 일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형태로서의 일상에 이 주방이 어느새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릇을 비운 후, 싱크대에 있는 빈 통을 보며 혼자 즐거워한다.

밤이 만족스럽게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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