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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r 21. 2020

열무김치 담글까

#엄마 편

열무김치 담글까?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고 엄마는 동네 마트로 가자고 했다.

오전 10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였다. 고향에서 올라온 엄마가 며칠간 돌봤던 조카들은 형네 집에서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호박 있니?"

"아뇨"

"오이 있니?"

"아뇨"

"양파는?"

"글쎄요. 그냥 다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응, 그래"



이 마트에서 카트를 처음 끌어봤다. (십수년 동안 바구니면 충분했다). 금세, 카트에 녹색이 가득했다. 갈치와 바지락까지 담겼다. 계란과 두부는 마지막에 추가됐다. 배달할 거냐, 는 직원의 질문에, 네,라고 쉽게 대답했다. 십수 년 동안 여기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 것도 처음이다.


마트에서 배달이 온 11시, 뚝딱, 엄마의 요리가 시작됐다.

혼자 사는 아들의 작은 주방에서.



열무김치에 쓸 밀가루 풀을 끓이면서, 비나물과 치커리를 데쳤다. 두 가지의 나물을 무치고, 갈치조림을 할 냄비에 무를 썰어 넣고 물을 자박하게 넣고 불을 켰다. 밀가루를 끓인 냄비가 뒷베란다로 간 자리에 된장찌개 냄비가 올랐다. 바지락은 중간에, 두부는 마지막 즈음에 들어갔다. 계란 두 개를 깨서 섞던 엄마가 하나를 더 깨라고 했다. 파와 양파가 들어간 계란말이는, 두툼해서 예쁘게 말리지는 않았다. 큰 김치통이 거의 바닥이어서, 작은 김치 그릇에 통째로 부어버렸다. 엄마는 빈 통을 바로 씻어 옆으로 치워뒀다.


이게 이 주방에서 가능한 일이구나, 새삼 놀란다.



"상 차리자"


라는 말에 거실의 책상으로 반찬을 날랐다. 비나물, 치커리 무침, 바지락 된장찌개와 계란말이, 그리고 갈치조림이 놓였다. 종로구, 동대문구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던 터라, 고향에 안 내려간 지 꽤 됐다. 포만감을 채울 동안 밀린 수다가 이어졌다. 혼자 살다 보니 나물을 잘 안 해 먹게 되더라, 라는 엄마의 말이 베란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진다. 볕이 오르는 날이었다. 엄마가 오기 전에 했던 빨래가 기분 좋게 마르고 있었다. 둘이 먹으니까 좋네, 라는 엄마의 말도 기분 좋게 흘러나왔다.



아침부터 움직였으니 엄마는 조금 쉬라고 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열무김치를 속도전으로 담글 필요는 없는 토요일이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는 동안 엄마는 벌써 열무 단을 끌렀다. 설거지가 끝났을 때는 열무는 이미 다듬어져 있었다. 열무를 씻을 큰 통을 찾다가 없어서 싱크대에 뚜껑을 닫고 물을 채웠다.


"고무장갑은?"

"버린 지 꽤 됐지요. 맨 손으로 하는 게 좋아서."

"그래. 됐다."



녹색의 열무잎이 찬 물에 씻겼다.


열무가 깨끗하네, 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열무를 담갔던 싱크대를 보니 물이 더럽지 않았다. 열무의 녹색은 청량했다. 바로 꺼내서 입에 넣고 싶을 정도로. 두 번을 반복해서 씻고 한쪽에 담아두었다. 얼마 전 우연히 샀던, 굵은 천일염 포대를 뜯어 사발에 반 정도 채웠다. 열무 한 단을 절일 때 들어가는 소금은 의외로 적었다.


 


잘 씻은 김치통에 열무잎을 담고 소금을 뿌렸다. 다시 잎을 담고 소금을 뿌렸다. 5번 정도 반복하니 통에 열무가 가득 찼다. 통을 한쪽에 치워두라고 했다. 숨은 금방 죽는다고 했다. 이 주방의 바닥에, 녹색의 열무잎에 가득 찬 통이 있는 풍경이 생경했다. 즐거워졌다.


맛을 기대한다기보다는, 그 풍경이 좋았다.



밀가루 끓인 물에 고춧가루를 에 걸러 풀었다. 다진 생강과 마늘도 같이 풀었다. 엄마는, 곱게 풀지 말고 양념 씹히게 먹을까,라고 말하고 에 거르는 걸 멈췄다. 무를 썰고, 양파, 파, 파를 길게 썰어 넣었다. 다 넣으니 냄비가 가득이었다.  


"뉴슈가 줘 봐."


정말 조금 넣는다 싶었는데, 싱거우면 이따 또 넣지 뭐,라고 엄마가 말했다. 천일염도 들어갔다. 나이 드니까 간을 짜게 맞추더라고,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맛있기만 할 터였다. 달게 해 줄까,라고 물어서 적당히,라고 대답했다. 별 소용없는 대답 중의 하나였다. 엄마는 맛을 보고, 뉴슈가를 조금 더 넣었다.  



열무의 숨이 죽을 동안 잠시 쉴 거라 생각했는데, 양념이 완성되자마자 열무가 담긴 통을 싱크대에 올렸다. 벌써?라고 묻자, 금방 죽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눈엔 아까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버지가 생전에 열무김치를 좋아해서 자주 담그셨으니 감으로 열무의 숨 죽음을 알고 있으시겠지.



다른 통에 열무를 옮겼다가, 김치통의 바닥에 조금 채우고 양념을 붰다. 중앙에서 왼쪽 구석으로 한 번, 손목을 꺾어서 오른쪽 구석으로 한 번. 다시 열무를 채우고 양념을 붇기를 반복했다. 녹색의 열무 잎과 붉은색의 양념이 차곡차곡 섞였다. 싱싱한 재료들은 각각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지만, 통 안에서 하나가 될 거였다. 통 하나가 알맞게 찼다. 열무 한 단에 한 통이구나, 하고 통과 재료의 양의 상관관계를 입력한다. 앞으로 내가 혼자 열무김치를 담글 일은 없겠지만.


"베란다에 하루 뒀다가 냉장고에 넣으면 돼."



남은 파와 양파는 저녁에 파전을 해서 먹기로 하고 둘이 뒷정리를 했다. 마트에서 사 온 고추가 눈에 띄어서 고추 넣어야 하나,라고 묻자, 아 참, 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고추를 길게 어슷 썰어서 통에 넣었다. 빨간색이 강렬했다. 국자로 뒤적이자, 고추는 금세 열무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1시였다. 10시부터 시작된 요리와 열무김치 담그기는 3시간 만에 완성됐다. 중간에 점심을 먹은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2시간 남짓한 시간이다. 엄마가 종종 자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데,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반찬을 자주 해줘야 하는데,라고 엄마는 말하지만, 아들인 나로서는, 엄마의 뚝딱, 요리는 가끔이면 된다. 이미 수십 년을 얻어먹었으니.



얼마 뒤 열무김치는 잘 익었고,

어느 휴일에 혼자 국수를 삶고, 열무김치 국물과 냉면육수를 반반 섞어

푸짐한 열무국수를 해먹었다.


당연히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자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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