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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29. 2020

외롭다기보단 외로웠던 기억을 만들어서

#정리 편


책을 정리한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감금(?)된 덕분이다.   

책장이 다 차서 책장 위, 테이블 위를 차지한 책들을 보며

마냥 쌓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책을 솎아내 팔기로 한다. 만만한 책을 고른다.

'나중에 다시 보지 않을 책'들이 열댓 권 쌓인다.


모서리가 접힌 페이지를 펴서 내용을 읽는다.

처음 페이지를 접을 때의 기준보다 관대한 기준으로 모서리를 다시 편다.

집을 임대해 지내다가 이사를 가는 기분으로,  

나의 흔적을 누군가가 신경 쓰지 않도록 한 장 한 장 꼼꼼히.



책을 뽑아낸 흔적 남아 있지 않다.


남은 책들이 금세 몸집을 부풀려 자리를 메웠다.

책을 덜어내고야, 책장이 무리했음을 깨닫는다.

내가 굳이 틈을 찾아 책으로 메워버렸었구나.


책장이 빽빽해질수록 책을 뽑는 횟수가 적어졌었다.

눈이 쉽게 가는 위치에 있는 칸의 책들은 종종 바뀌었지만,

구석 칸의 책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지런히 보관된 순간부터 책들은 방치된 셈이다.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책장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어쩌면 내가 빈 공간을 참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니, 감정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틈만 있으면 되는 대로 욱여넣는다.

책 사이의 틈이 보이면 힘을 줘 책을 껴넣듯이.

무슨 감정을 버리고 무슨 감정을 남길지에 대한 엄격한 기준도 없이,

막연히, 언젠가 들춰볼 거라는 생각으로 감정들을 껴넣는다.


빽빽해진 감정들을 꺼내보기란 쉽지 않아서 먼지만 쌓인다.  

처음 그 감정을 느꼈던 순간의 풍경만 간직한 채,

과거 그 일시적인 순간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요즘 대상 없는 외로움이 반복된다.  


외로움을 일으킨 상대는 물론, 외로움을 느끼는 나 자신조차 불확실한 그런.  

그것을 내내 떠올리고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속으로 버리기로 한다. 찾으면 조그마한 틈이 있을 테니.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난 외롭다기보단 외로웠던 기억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채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직면하지 못하는 건,

외로움 같은 감정이 아니라 내 안의 빈 공간이 아닐까.



빈 마음에 조급할 때가 있다.


지금보다 나이가 적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를 미성숙하다고 느꼈으니까.

앞으로 겪을 일이, 채워갈 경험이, 만나게 될 감정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기에 틈이 많은 내 마음은 오히려 고마웠다.

그걸 채운다는 이유로 유치하고 바보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난 지금까지 뭐 했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난 누군가와의 감정 교류에 서툴고, 스스로의 감정을 정의하는 데에도 미숙한데...

정체 모를 감정에 휩싸이면 아무것도 못하고 제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마는데...


그래서인가 보다.

내 마음에 남아있는 틈을 두고 보지 못하고 빽빽하게 채워버리는 게.

그 감정들을 내가 꺼내보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쓴다 해도,  

적어도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비워두는 것보단 뭐라도 채워두는 게 위안이 되니까.



아무렇게나 넣어뒀던 감정들을 다시 꺼낸다.

쌓인 먼지를 불고, 제목부터 찬찬히 살펴본다.

혹시나 접힌 모서리가 있으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틈을 두고 보지 못해

또 다시 이런저런 감정과 기억들을 채워 넣을 테지만,

당장 지금은, 보관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솎아낸다.   


하나씩, 낡아버린 위안들이 쌓인다.

마음이 헐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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