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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22. 2020

낡은 칫솔이 배달됐다

#오래된 세간 편

(...) 나는 어려서 고모가 그랬던 것처럼 염화칼슘 이십 킬로그램을 자루로 샀다.

홍유는 차라리 제습기를 사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 세간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마치 여행자처럼, 가져온 짐만으로 이 계절을 넘겼으면 했다.


-소설 「복자에게」中, 김금희





전동칫솔이 멈췄다. 14년 만에 완전히.


몇 주 전부터 전조가 있었다. 늦은 밤 욕실에서 소리가 나서 가보니 전동칫솔이 켜진 채 욕조를 나뒹굴고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 세워놨었는데 저절로 전원이 켜지면서 욕조로 굴러 떨어진 듯했다. 며칠 뒤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결국 욕실 구석 수건 더미 위로 전동칫솔을 옮겨놓았다.


그 뒤에 이상 증세는 버튼에서 나타났다. 버튼은 하나였는데 그게 눌리다 말다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을 주어 누르면 되길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점점 더 안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떨 때는 꺼지지 않아 한참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며칠 전 아무리 애를 써도 전동칫솔은 켜지지 않았다. 아쉽지만 버려야 할 때였다.


14년 전 전동칫솔을 살 땐 이렇게 오래 쓸 줄 몰랐다.


어느 순간 알아서 고장 나겠지 생각하고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았다. 습기로 고무 부분이 검게 변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딱히 신경을 쓸 물건도 아니었다. 칫솔이라는 게 원래 소모품이고, 전동칫솔도 마찬가지였다. 교체용 칫솔모를 더 이상 팔지 않아, 중국 쇼핑몰에서 주문할 때는 이렇게까지 애착할 필요가 있을까 해서 피식 웃음이 났었다.


멈춰버린 칫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칫솔은 이 집을 낯익게 해 준 물건이었다.


14년 전 혼자 이 집으로 이사 온 첫날밤, 나는 작은 방 바닥을 대충 닦은 뒤 방 문을 잠그고 잤다. 학교 앞에서 살던 원룸과는 달랐다. 문 하나만 닫으면 모든 것이 시야에 보이는 원룸과는 달리, 이 낡은 집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짐을 다 풀지 않아서 어수선한 공간들에서 나는 작은 소음들로 인해 마음이 불편했다.


낯선 동네 낯선 집에서의 첫날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낯섦은, 딱 작은 방만큼이었다.


다음 날부터 짐을 정리하면서 이 집을 편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1톤 이삿짐 트럭을 채 채우지 못했던 세간들 덕분이었다. 원룸에서 가져온 낡은 책상이며 전자레인지, 그릇, 유리잔 등을 풀어놓으니 비로소 내 공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쓰던 물건들나의 시선을 채우자 집 안 풍경이 어색하지 않아 졌다.


이사 오기 얼마 전에 샀던 전동칫솔도 그런 물건 중 하나였다. 오래된 타일로 된 휑뎅그렁한 욕실(누구의 표현대로 영화 추격자에서 시체를 처리할 법한, 칠 벗겨진 욕조가 있는)에서 양치를 하며, 칫솔이 내는 낮은 모터 소리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렇게 낯익은 물건들이 자신의 소용에 따라 새로운 자리를 찾듯이, 나도 나 자신을 유지한 채 그저 공간을 옮긴 것뿐이었다.



그 뒤 14년 동안 물건들을 하나씩 늘렸다.


커튼, 세탁기, 책장, 스탠드, 옷, 신발, 화분, 약간 더 큰 냉장고, 약간 더 선명한 텔레비전...... 사람이 한 명이 살든, 여러 명이 살든 필요한 물건의 종류는 비슷했다. 새로 들인 물건들은 기존의 물건들이 만들어 놓은 낯익은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언젠가 집주인 아저씨가 한 번 둘러보고 웃으며 말했다.


"살다 보니 짐이 점점 늘어나지요? 원래 그래요."


맞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물건을 늘리지 않는 게 만족을 준다 하지만, 내가 고른 물건들로 집이 조금씩 채워진다는 건 이 집을 내가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가 이 집에 익숙해질수록 세간이 늘어났고, 내 물건이 늘수록 집은 더더욱 낯익은 곳이 되었다.


내 시야를 채우는 익숙한 것들,

그것들이 바로 낯익은 곳을 만드는 조건이었다.



여하튼 '전동칫솔의 죽음' 이후, 새로운 전동칫솔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그 전동칫솔로 양치를 하면서 꽤 만족해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파에 누워 쇼핑앱을 뒤졌다. 14년을 버틸 만큼의 내구성은 기대하지 않고 고르기로 했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양한 종류의 전동칫솔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쉽게 고를 수 없었다. 웹툰 미생의 대사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이 생각났다. 자꾸 멈춰버린 낡은 전동칫솔로 눈이 갔다.


그러다가 중고거래 앱인 당근마켓을 봤는데,

놀랍게도 내가 쓰던 칫솔과 같은 모델이 올라와 있었다.


세상에. 날짜도 바로 며칠 전이었다. 예전에 선물 받고 보관만 하던 거라는 설명과, 오래돼서 박스 등이 낡아 보이니 그런 데 민감한 사람은 피해 달라는 당부가 쓰여있었다. 단종이 돼도 한참 전에 됐을 텐데, 억지로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었을 텐데...... 다른 구매자가 예약했다는 표시가 떠 있어서, 혹시 그 거래가 불발되면 구매하겠다는 쪽지를 남겼다. 다행히(?) 앞선 거래가 불발이 되었고,


며칠 뒤 '새로운 낡은 칫솔'이 집으로 배달됐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브랜드의 전동칫솔을 샀어도 금세 적응했을 것이다. 예전처럼 대수롭지 않게 양치를 하고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물건의 소용이 다할 즈음에야 그걸 쳐다보면서 며칠 전과 같은 소회나 떠올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같은 칫솔을 얻게 된 건 왠지 요행 같다. 릴레이 계주에서 바통을 터치하듯 충전기는 새로운 걸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고, 칫솔모를 다 사용한 후에는 오래전에 구매한 교체용 칫솔모로 갈아낄 것이다. 새로운 칫솔이 앞으로 몇 년이나 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단 몇 년 혹은 몇 달이라도,

낯익음을 낯익음으로 대체한 것만으로 만족다.


이 낡은 집은 이미 너무나 낯이 익지만, 여전히 나의 시야를 채우는 '익숙한 무엇'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밖에서 낯선 기분을 잔뜩 묻히고 들어왔을 때, 낯익은 것들로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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