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Jul 02. 2020

14년째 성실하게 비는 새고

#유지보수 편

비가 새는 거니?

금방 고쳐준대요.


14년 전 이 집에 이사 온 초창기, 큰 방 앞의 젖어있는 천장을 보며 아빠가 물었다. 질문도 대답도 대수롭지 않았다. 천장은 뚫린 게 아니라 젖었을 뿐이니까.


아직 새니?

고치고 있대요.


몇 년 뒤 같은 자리에 있는 '젖은 흔적'을 보고 엄마가 물었다. 실제로 집주인 아저씨가 몇 년째 옥상에서 방수공사를 하고 있었기에, 역시 대수롭지 않았다. 게다가 비는 매일 오지도 않으니까.


아직...이지?

그거 뭐...

덮자.


4년 전, 이 한 마디를 내뱉은 엄마가 (여기 사는 나도 모르는 곳에 가서) 폼 블록 스티커 벽지를 사 왔다. 안에서 덮으면 빗물은 어디로 가나, 를 입 밖에 내려했지만 엄마의 세상 단호한 표정 앞에서 도로 삼켰다. 깔끔하게, 누수의 흔적이 덮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빗물은 벽지의 안쪽으로 끊임없이 흘러 벽 전체가 지저분해졌다. 결국 작년 어느 주말에 벽지를 다 뜯어냈다.


얼마 뒤 들른 집주인 아저씨가 '벽이 마를 때까지 두고... 내가 옥상 방수공사를 다시 해볼게요.'라고 말했다. 성실하신 분이다. 믿기로 했다. 하지만 '누수 무늬'의 벽을 그냥 두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벽이 완벽하게 마른 후 패브릭으로 가렸다. 이 패브릭은 얼마나 버틸까 생각하려다 말았다.



낡은 집은 의외로 온전해서 크게 손이 가지 않는데, 이 집은 유독 비에 관해서만은 허점을 드러낸다. 


이사를 온 해 여름, 잠을 자다가 시냇물 소리에 깬 적이 있었다. 뭐지. 분명 창밖의 빗소리와는 다른 소리였다. 처음에는 가만히 서서 듣다가, 집안 곳곳에 귀를 대보기 시작했다. 소리는 작은 방의 문틀에서 나오고 있었다. 집 안에 물이 흐를 수가 있구나,를 처음 알았다. 벽 뒤의 빈 공간에서 공명한 소리는 나름 청아했다. 크게 거슬리지 않아서 놔두었다. 생각해보니 잘한 일이었다. 잘못 말을 꺼냈다면 집주인 아저씨가 성실하게 문틀을 뜯고 10년이 넘게 공사를 했을지도 몰랐다.



비가 오면, 얼룩의 번짐의 정도로 비의 양을 측정한다.


비에 관해서만큼은 솔직한 집이기에, 강수량이 그대로 누수량이 된다. 오차나 속임수 같은 건 없다. 비가 오면 천장과 패브릭이 젖고, 젖는 부위는 번진다. 번짐은 흔적을 남긴다. 불에 타는 종이의 최전선 같은-마지막 울분 같기도 하고 제대로 된 홀가분함 같기도 한- 검지도 않은 누런 흔적이 남는다. 비가 그치고 물기가 말라도 흔적은 그대로다. 예전 흔적 옆에 새로운 번짐의 흔적이 더해진다. 새 흔적과 헌 흔적의 차이는 없다. 다만, 새로운 번짐은 헌 흔적을 먼저 적신 후에 생긴다.



벽은 몇 겹으로 가려져 있다.


오래된 차례로 보자면, 보드, 나무, 헌 벽지, 새 벽지, 폼 블록 벽지, 그리고 패브릭 순이다. 상시적으로 보고 싶은 않은 것을 가리는 습성은 변하지 않는다. 무슨 막으로든 가리고 그 막에 문제가 생기면 시야를 막는 새로운 막으로 가린다. 하지만, 그 가림을 뚫고 강수량이 침범한다.


14년 동안 미안해하는 아저씨가 무색하게 비는 꾸준하다. 성실하게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빗물이 번질 때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멈춰 서서 어느 정도 번졌는지 확인하거나, 큰 비일 경우에 바닥에 걸레 하나 던져 놓는 게 다다. 패브릭이어서 습도 조절에나 도움이 됐으면 좋겠지만, 역시나 대수로운 기대는 아니다.



전까지, 건축물의 구조나 건자재의 종류, 같은 단어는 떠올릴 필요가 없는 단어였다. 아무리 낡은 집에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집에 살게 된 후부터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집을 지었길래 이럴까 해서.


14년째 방수공사 중이라고 하면 다들 농담인 줄 안다.


하지만 진짜다. 처음에 천장 몇 군데가 축축하게 젖었을 때, 이러다 말겠지 했다. 집주인 아저씨는 짬이 날 때마다 옥상에서 작업을 했고 몇 군데는 잡혔다. 하지만 유독 낡은 부분인 큰 방 앞 거실 천장은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천장의 나무판자가 삭아서 부서질 정도다.



집이라면 응당 막아내야 할 것들을 막지 못하는 집에 살면서도, 그 치부에 화가 나지는 않는다.


(천장이 더 뚫려서 그 사이로 벌레가 우르르 들어온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딱히 불편한 점도 없거니와, 이 낡은 집이 허점 하나 없이 매끈했으면 심심했을 거 같다. 비가 오지 않는 날, 눈으로 번진 선을 따라가 보다가, 외면하다가, 가림막이 된 패브릭을 들추려 하다가, 보고 심란해질까 봐 차마 들추지 못하다가, 마음을 비우려다가 '비우려는 마음'이란 단어를 떠올리다가, '비 오려는 날씨'로 바꿔 생각하다가, 이 자연스러운 의식의 자동화에 웃어버린다. 비가 오면 번짐의 정도로 나만의 강수량이나 측정하면 되지 뭐.



어쩌면, 14년째 사는 이 낡은 집은 내가 불성실해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밖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아무런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늘어져도 되는 그런. 그래서 이 낡은 집의 성실한 누수를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다.


처럼 이 집도, 온전함과 완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한 구석 무책임질 수 있는 곳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그럼에도, 굳이, 집주인 아저씨가 완벽하게 고쳐준다면야 굳이 거부하진 않을 거다. 그분의 표현대로, '90년대에 집 장수들이 날림으로 지은 집'이어서 '천장의 시멘트를 너무 얇게 발라서 다 조각조각 나서 그 사이로 비가 새는 거'라면... 매우 요원한 일이겠지만.

이전 01화 일상의 낡은 무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