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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16. 2020

일상의 낡은 무늬

#20년 된 세탁기를 수리하는 일


14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재활용센터에서 중고 세탁기를 샀다.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뒷베란다가 좁았고, 혼자 사는 데 큰 세탁기는 필요 없거니와, '결혼 전까지 대충 쓰다가 나중에 바꿀' 요량이었기에, 5.5kg 용량의 작은 세탁기를 선택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 집에서 14년을 살게 될 줄도, 결혼에 관심이 없어질 줄도, 그런 이유로 이 세탁기를 14년 동안 쓸 줄도. 겨울이면 수도가 어는 낡은 주택의 뒷베란다에서 세탁기는 매 주말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그동안 내부 통의 밑판이 빠져서 한 번 A/S를 부른 거 외에는 고장도 없었다. 수많은 옷이 그 세탁기 안에서 시작과 마지막을 맞이했다. 내가 쓰기 전에도 누군가 썼을 테니, 대략 20년 정도 무난하게 버텨온 셈이었다.



며칠 전 술 약속이 없는 금요일 퇴근길,  골목에서 본 뒷베란다가 이상했다.


해가 쨍쨍한 날이었는데 베란다 외벽이 옴팡 젖어 있고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낡은 집에 오래 살면 집이라는 게 생각보다 단순하는 걸 안다. 이 맑은 날에 물이 흐른다면 뭔가 터졌다는 의미다. 집으로 뛰어가 뒷베란다로 가보니 가관이었다. 수도꼭지에서 나온 호스가 세탁기에 연결되는 부분에서 물이 치솟고 있었고, 바닥에 물이 찰랑찰랑 차 있었다. 세탁기 안과 베란다 창틀에도 물이 가득했다. 급하게 수도만 잠근 뒤, 이 난장을 치울 의욕을 상실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의 의욕을 되찾은 후에 살펴보니, 호스와 세탁기를 연결하는 플라스틱 급수밸브(이게 '급수밸브'라는 것도  나중에 검색해서 겨우 알았다)의 나선형 홈이 뭉개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수돗물을 틀어놔도 호스가 꽉 조여서 물이 새지 않았겠지만, 뭉개진 부분이 수압으로 인해 터진 어느 순간부터 물이 넘쳤던 것이다.



드라이버로 세탁기 뒤의 덮개를 뜯었다.


플라스틱 급수밸브는 온수와 냉수 두 개가 있었는데, 냉수 부분은 10년 전쯤 겨울에 물이 든 호스를 연결해 두었다가 얼면서 금이 가서 못 쓰, 온수 쪽 밸브만 사용해 온 터였다. 혹시 다시 조립하지 못할까 싶어 일단 고장난 지 오래된 냉수 쪽 파란색 플라스틱 밸브를 풀어보기로 했다. 나사가 총 6개였는데 4개직선으로 드라이버가 들어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좌절하고 그냥 A/S를 부를까 하다가, 풀기 쉬운 2개의 나사를 풀어봤다. 그랬더니 선과 연결된 밸브가 통째로 움직여 나머지 나사도 풀 수 있게 됐다. 쉽네. 세탁기에서 분리해 낸 파란색 플라스틱 밸브는 손바닥 1/3 정도의 크기였다. 이것만 구하면 다시 끼워 넣는 건 5분도 안 걸릴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새 부품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사 오면 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토요일 아침, 9시를 기다려 (상담원 연결까지 10분이나 걸리는) 서비스센터에 물어보니, 일단 상담원이 내가 말하는 부품이 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상담원은 '그거 호스 문제니까 호스를 사면 돼요'만 반복하다가 엔지니어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그리고 엔지니어의 답은 확고했다.


'부품은 따로 판매하지 않습니다. 서비스 기사를 부르셔야 합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품은 있을까요, 하고 묻자 엔지니어는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투로, 12년 안쪽으로 생산된 것들은 거의 다 있거라는 애매한 답을 했다. 접수 센터에 전화해서 모델명을 대고 알아보라고 했다. '내 껀 12년이 더 됐다고요'라고 말하려다 말고, 부품이 있다면 비용은 얼만 정도일지 묻자, 5만 5천 원에서 6만 원 정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6만 원을 들여 20년 된 세탁기를 고치는 게 맞나 고민했다.


조만간 또 고장 나지 않을까. 모터 같은 부품이라도 고장 나면 돈은 훨씬 더 들 텐데, 그 돈으로 낡은 세탁기의 생명을 연장하는 게 경제적일까. 12년을 훌쩍 넘어 20년이 된 이 세탁기의 부품은 구하기 힘들어 더 비쌀 텐데. 차라리 새 거를 살까.


하지만, 몇십 분 동안 수많은 세탁기를 검색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음에 드는 세탁기는 비쌌고, 평범한 세탁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14년 전 이사 올 때 했던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잠깐 쓰고 바꿀지도 모르는데 굳이......'


덮개가 열린 세탁기를 손으로 쓸어봤다. 평소라면 주말 오전에 신나게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부품 하나 때문에 정든 세탁기를 내다 버리는 건 뭔가 아닌 듯했다. 고치지 뭐. 하지만 다시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기 전, 숙련된 엔지니어가 손바닥보다 작은 플라스틱과 드라이버 하나를 들고 와서 5분 만에 일을 끝내는 상상을 했다. 그건 도무지 효율이라고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사만 몇 번 돌리면 되는데 6만 원이라니...



어디선가 이걸 팔겠지, 세탁기 모델명을 치고 부품을 검색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찾는 플라스틱 부품은 뜨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청계천 쪽 세탁기 부품점 두어 군데에 전화를 걸어 물어봐도 그런 건 없단다. 사설 수리 업체에 있지 않을까 해서 검색해서 전화를 하니, 7~8만 원에 갈아주겠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시장은 견고했다. 이해한다. 그래야 수리 시장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결국 월요일 아침에 서비스 업체에 전화를 걸어서 A/S를 신청하는 게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회사에서 일을 보고 와 저녁에 쉬면서, 부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검색했다. 내가 찾던 부품을 직접 사서 비슷한 연식의 세탁기를 직접 고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그 부품의 이름은 '급수밸브'였다. 글쓴이가 친절하게 링크해놓은 부품 업체의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찾은 끝에, 내 세탁기 모델에 맞는 중고 밸브를 1만 원에 주문할 수 있었다.



드디어 부품이 도착한 오늘, 세탁기를 고쳤다.


예상한 5분보다는 더 걸렸다. 새로 온 부품은 위화감이라고는 없이 낡은 세탁기 안에 제자리를 찾았다. 파란색 밸브가 부서진 지 10년, 분홍색 밸브의 홈이 망가진 지 4일 만에. 덮개를 덮다가 왼쪽 플라스틱이 조금 망가졌지만 괜찮았다.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주고 호스를 연결했다.


주말에 하지 못한 빨래를 넣고 돌리자 살짝 높은 기계음이 나더니 이내 예전의 소음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몇 년이나 이 낡은 세탁기에 의지해서 살지 모르겠다. 세탁기를 고치기 전 뒷베란다 문에 기대 물끄러미 멈춘 세탁기를 볼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일할 때도 뭔가 미진한 기분이 따라다녔다. 빨래야 며칠 늦게 해도 되고, 정 안 되면 빨래방을 가도 될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자신만의 음(音)을 내며 돌아가며 세탁기를 보면서 그 기분의 실체를 깨닫는다. 그건 내가 이 낡은 집에서 14년간 조금씩 조정하며 만들어온 내 일상의 무늬 때문이었다.


20년이 된 조그만 세탁기가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빨래라는 행위가 하찮아 보여도, 그건 주말에 내가 안정감을 찾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토요일 아침 세탁기를 절반 정도만 채워 빨래를 두 번 돌릴 때면 주중에 어질러진 일들이 정리되는 느낌이었고, 다 된 빨래를 탁탁 털어 베란다에 가지런히 널면 마음껏 늘어져도 되는 주말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 작은 루틴이 있었기에 바쁜 주중이 평화로울 수 있었다.


작은 부품 하나로, 일상낡은 무늬 다시 돌아왔다.



뒷베란다를 치우다가 망가진 밸브 두 개를 바라본다.


20년 동안 고생했던 밸브를 차마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공구함 구석에 넣어둔다. 이 플라스틱 밸브는, 나의 낡은 세탁기가 수명을 다해 어딘가로 실려갈 때 같이 넣어줄 생각이다. 그래야 내 일상을 온전하게 지켜준 세탁기가 온전하게 수명을 다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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