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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24. 2020

나라는 영역이 희미해질 때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무당벌레로 인한 사무실 소동으로 첫 신을 시작한다.


여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무당벌레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몇몇 직원은 잡아 죽이려 한다. 박동훈 과장(이선균)은 굳이 죽일 필요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산 채로 잡으려 한다. 하지만 이지안(아이유)은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신의 팔에 앉은 무당벌레를 종이뭉치로 쳐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사무실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 하나로, 드라마는 단번에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무해한 걸 알지만 나에게 달려들 때 공포로 느낀다. 반면 박동훈은 같은 이유(무해하다는 그 이유)로 무당벌레를 살리려 한다. 이지안은 아예 다르다. 자기 곁에 오기 전까지 관심이 없다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순간 가차 없이 내친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인데도 다시 보니, 첫 신부터 고민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드라마적인 의미와 별개로 (당연히, 도심 사무실의 방역 시스템이나 자연친화적이지 않은 생활습관 등과 같은 재미없는 주제와도 별개로) '무당벌레를 다루는 건 쉬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무당벌레가 사무실에 나타난다면 살릴 방법은 하나다. 무언가에(볼펜이나 뭐나) 앉게 한 후에, 무당벌레가 그 물건의 위쪽 끝으로 올라가지 앉도록 계속 물건을 아래위로 뒤집어주면서 창 밖에 놔주면 된다.


오래전, 사격훈련을 받던 중 쉬던 풀밭에서 이걸 처음 알았다.



볕이 쨍쨍하던 풀밭엔 무당벌레가 지천이었다.


작고 빠르지 않은 이 벌레는 당연히 무해했고, 사람들에게 달려들거나 윙윙대지도 않아 성가시지 않았다. 한 마리가 내 종아리를 따라 올라왔다. 군복 색이 짙은 풀색이어서 벌레 입장에서도 별다른 위화감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당벌레는 쭈그려 앉은 내 무릎까지 오르고 잠시 머뭇대더니 날아갔다. 대수롭지 않았다. 잠시 뒤 다른 한 마리가 비슷한 경로로 오르더니 역시나 무릎의 끝에서 주춤대더니 바로 날개를 폈다. 종아리나 아니면 허벅지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혹시 내려가는 방법을 모르나,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휴식시간에, 딱히 볼 게 없는 풀밭이어서 생각들은 어차피 다 시답지 않긴 했다.)


한 마리를 잡아서 손바닥에 놓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비스듬히 세우고 관찰했다. 무당벌레는 검지의 끝까지 올라갔다가 중지로 옮겨가더니, 역시나 끝에서 날아올랐다. 재밌. 조심스럽게 한 마리씩 잡아 팔꿈치에, 나뭇가지에, 총에 올려놓았다. 약속이나 한 듯 타고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서 날아갔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 끝까지 오르기 바로 직전에, 총을 위아래로 뒤집으니, 무당벌레는 가던 방향을 바꾸어 다시 위로 향했다. 위, 한 방향만 아는 듯했다.



주위 누구도 무당벌레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난 이 벌레가 보이는 묘한 통일성이 재밌었다. 이곳을 떠나 날아갈 곳은 기껏 낮은 풀이나 나무일 텐데, 무당벌레는 개의치 않았다. 발의 마찰력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서두르지도 주저하지도 않는 속도. 기를 쓰고 올라간 뒤에는 모든 무당벌레가 같았다. 자신이 디딘 정상의 공간을 더듬었다. 마치 이렇게 스스로에게 확인하는 듯했다.


여기보다 더 높은 곳은 없는가.

내가 오를 곳이 남아있는 건 아닌가.

나의 실수로 여기서 멈춤으로써, 밟을 수 있는 곳을 못 밟는 건 아닌가.

내가 닿을 수 있는 것들이 나로 인해 미지로 남겨져버리는 건 아닌가.


위로만 향하는 삶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무당벌레의 성실함에 대해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상에서 보여준 맹목적인 포기에 대해서도. 더 높은 곳이 없다는 걸 확신한 순간 무당벌레는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미련이나 후회, 주저함은 없었고, 세상을 등지겠다는 거창한 비장미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밟아본 이곳을 떠나 밟아보지 못한 곳으로 갈 뿐이었다.


그렇게 작은 무당벌레는 자신의 발로 자신의 세상을 넓혀갔다.



무당벌레의 비상을 보았던 비슷한 시기에, 반딧불이를 처음 보았다. 


연천의 어느 훈련장, 야간 훈련이 시작되는 숲에 갔을 때 시야에 반딧불이가 수북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황홀하다기보다는 신기했다. 반딧불이 꽁무니의 빛이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며 숲을 밝히고 있었다. 옷이나 총에 잠시 붙어 쉴 때도 벌레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얼마 뒤, 이동 신호가 들리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연두색의 빛은 숲에 남았다.


그 밤 난, 수천 년간 숲이 선사해 온 비밀을 우연히 분양받은 느낌을 받았고, 내 안에 어떤 영역이 추가된 듯해서 뿌듯했다. 반딧불이가 발하던 빛은, 반쯤 어둠에 몸을 숨기고 반쯤 내보이면서 조심스럽게 청하는 악수 같았다. 반딧불이가 빛으로 무엇을 의도했는지(종족의 번식인지 숲의 안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반딧불이는, 모두를 홀리는 빛의 반경 안으로 세상을 끌어모으는 듯했다.



나라는 영역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몰라 제자리에 우뚝 서 버리고 싶은 그런 때가.


기를 쓰며 넓혀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공간은 제자리인 게 아닌지 의심하고, 내 영역으로 들어온 미지의 손님에게 불친절하지 않았는지 회의한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려니 했는데 여전히 어떤 상황들은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치이고 낡아지고 상처가 난다.


그럴 때 먼 기억 속, 무당벌레의 풀밭이나 반딧불이의 숲으로 도망치곤 한다.


종(種)으로는 한갓 벌레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스스로에게 충실했다. 자신을 드러낸 곳에서 그들은 여유가 넘쳤다. 직접 발로 확인하며 자기만의 영역을 늘려가는 무당벌레와, 자신이 밝히는 영역 속으로 세상을 초대하는 반딧불이에게 주저함은 없었다.


그건 그들이 '영역 밖'을 욕심내지 않아서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나는 욕심과 예단 속에서 내 영역 너머를 신경 쓰느라 정작 내가 딛고 있는 이곳에 소홀한 건 아닐까. 그럼으로써 자꾸 불안해서 내 발 밑을, 등 뒤에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게 아닐까.


심란한 것들의 리스트를 적어야겠다. 내 손으로 하나씩 빠지지 않고 적다 보면, 나라는 영역이 조금은 뚜렷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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