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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02. 2020

형편없는 수면 실력


낯선 곳에서 긴 잠을 잔 기억이 많다.  


꿈에 빠져들어 허우적대지도 않고, 새벽에 깨서 시계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럴 때면,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싶어서 피식하곤 한다. 잠을 설치며 짐을 싸고, 정류장과 공항과 거쳐 다시 숙소까지 이동하는 과정 내내 신경을 썼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새로운 자극들을 받아들이느라 다른 틈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류의 피곤함은 종종 겪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낯익은 감정들을 내 안의 가둬 넣고 떠나와서가 아닐까.


여행이 끝나면 어쩔 수 없이 그 방의 자물쇠를 열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낯선 곳에선 그것들을 모른 척할 수 있으니까. 물리적으로 떠나온 곳에선 죄책감이나 초조함 없이 감정들을 버려둘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감정들이 살아날 기척이라도 있으면, 다시 낯선 거리로 달아나면 되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둘러싸인 곳에서, 몸은 제 살길을 찾는다.


모든 감각들은 익숙한 패턴을 버리고 제멋대로 흘러간다. 하루하루 처리할 수 있는 자극의 양은 정해져 있기에, 한계를 넘는 것들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깨어있는 동안 시달린 덕분에, 자는 동안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형편없는 수면 실력을 가진 나에겐 매우 고마운 일이다.



아무도 누구를 신경 쓰지 않는 골목에선 밤의 숙면을 고대할 수 있다. 떠나간 곳에선 부러운 것 투성이다. 단순해질 대로 단순해진 사람들의 동선이 부럽고 따분한 듯한 표정도 부럽다. 남의 눈총을 받지 않을 정도로만 챙겨 입은 옷차림도, 왠지 모르게 확연히 보이는 그들의 취향도 다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도 갖고 있는 것들인데, 하고 있는 것들인데......


어쩌면 나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스쳐 지나가고만 있던 건 아닐까.

나 자신을 부러워할 여유가 없었던 건 아닐까.



낯익음 때문에 덜컥 겁이 나 어쩔 줄 몰라할 때가 있다. 스스로 만들어버린 감정의 덩어리들에 흡착돼버린 기분. 좁은 곳에서 생각이 엉켜버려서 어떤 단어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기분. 그럴 때면 소음이 그리워 번화가로 나가곤 한다. 사람들이 두리번대는 소리를 들으며 안심한다. 어쩌면 매일매일 다른 사람에게서 낯섦을 찾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나 스스로를 관찰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 대해 아무 기억도 없는 사람처럼, 새로움에 대한 호의만 가득한 얼굴로.


그런 밤에는 꿈 없이, 긴 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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