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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r 20. 2018

동백이 이른 봄, 선운사

#선운사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온전히 취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작은 새', 잘랄 앗 딘 알 루미




시간은 기억보다 빠르게 흐르지만, 

시간의 물결을 견디는 자그마한 돌 같은 장소들이 있다. 


대학교에 입학한 3월, 친구와 왔던 선운사가 그랬다. 

이곳에선 바람이 큼직큼직하게 불었고, 동백꽃이 소리 내며 떨어졌다.

어두운 동백나무 숲 안을 바라보며, 

어쩌면 앞으로 세상에 서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였다. 

거제에서 오전에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선운사를 경유지로 찍은 건. 

절 뒤로 돌아가면, 

동백꽃이 떨어지는 걸 말없이 듣고 서 있던 

스무 살의 취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운한 건 요즘도 쉴 새 없다. 



월요일, 오후 2시에 선운사로 걸어가며, 송창식의 '선운사'를 흥얼거렸다. 

어릴 적, 은색 엑셀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아버지가 자주 틀던 송창식 베스트 앨범에 있던 노래였다. 

아마, 송창식도 비 오는 평일 오후에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야 텅 빈 선운사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절을 나올 때까지 내가 본 관광객은 3명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다. 

앞산과 뒷산에 낮게 흐르던 구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온전하게 새로운, 선운사와 동백숲이 눈 앞에 있었다. 



절 앞마당에 소원들이 줄을 맞춰 달려있었다. 

굳이 이 색깔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녹색 등을 고를 것이다. 

녹색은 땅에 있어도 매달려 있어도 숲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역시나 누구도 나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등들은 서로의 존재로 안도하면서 비를 맞고 있었다. 

조용한 소원들이었다. 



숲은 경내로 길게 고개를 빼고 있었다. 

동백나무의 두껍고 짙은 잎은 저렇게 떼로 모여 밀도를 가진다. 


어느 시절에도 낡아지지 않을 밀도다. 



어느 절에 가건 산신당은 늘 아담해서 눈이 간다. 

선운사의 산신당도 마찬가지다. 


동백나무는 산신당 뒤로 바짝 내려와 있었지만

왠지 지붕 위로 가지를 내릴 것 같진 않았다. 


둘 사이에 그 정도의 암묵은 오래전부터 있을 듯했다. 



한참을 서 있었다. 

스무 살 때 보았던 그 나무가 이 나무였을까.


툭, 하며 고개째 동백꽃이 떨어지며 내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어디를 보아도 꽃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길을 따라 들어와, 길을 내며 나간다. 


풀은 잔뜩 누운 채 바람을 흘려보내고 

숲은 공을 들여 잎을 흔든다. 



동백의 봄은 아직이다. 


다소간의 시간이 지나면, 풍경은 꽃으로 인해 달라질 것이다.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까지.


그런 이유로

아직, 은 어쩌면 위안이 된다. 

만개하기 전에 선운사에 들러서 다행이다. 



못난 어휘로, 저 두근거림을 설명하는 건 

두서없는 일이 될 것이다. 

 


활짝 핀 꽃의 자리와, 몽우리가 있는 자리는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로, 순서를 갖고 피겠지만. 


문득, 이만큼 살아내면서도 확실한 이유 몇 개 없는 게 부끄러웠지만,

그래서 늘 쫓기는 듯하고, 우울하고, 고민이 넘치는 삶이 변하지 않는 게 답답했지만,

새삼 꽃 앞에서 떠올릴 고해성사는 아니었다. 



먼저 펴버린 동백꽃 몇 송이는 어쩌면 성격이 조금 급해서였을 뿐일지 모른다. 

다들 비슷한 시기를 버티다가 내년을 기억하며 스스로 가지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래서 

핀 꽃도, 필 꽃도 굳이 서로의 자리는 탐하지 않는다. 





숲에서 눈을 돌릴 즈음, 안개 같던 비가 방울을 이루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정리하기 전, 숲이 바라보고 있을 풍경을 한 컷 찍었다. 


내처, 무리 없는 풍경이었다. 



꽃들이 만개할 즈음 이 풍경 안에는 사람들이 그득할 것이다.  


출장 길에 요행히 짬이 났음에 감사했다. 


동백이 이른 봄의 선운사는 또 하나의 취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훌쩍 시간이 지난 어느 때, 이날의 기억 하나 잠깐 꺼내서 

차를 몰고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이 숲 앞에 서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동백꽃이 지는 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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