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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19. 2020

완전히 새로운 욕망이 아니더라도

동일한 욕망의 악보를 각기 다르게 연주하는 것,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나의 욕망은 너의 욕망을 다르게 연주한 것에 불과하다.


-유하 산문집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中





너머,를 동경한 때가 있었다.


세상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으며 올라가면, 모든 풍경이 나를 따라올 것 같았다.

나에게만 감추어진 것들이, 저 너머에서 나를 환영할 거라고 기대했다.


불완전한 지금을 어떻게든 넘기면, 조금은 완전해진 욕망을 가질 수 있겠지.

여기를 떠나 저곳으로 넘어가면, 욕망은 확실하게 채워지겠지.

포장을 뜯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척, 하니 내 앞에 놓일 수도 있겠지


너머,를 상상하는 눈은 그래서 즐거웠다.  



하지만 전격적으로 다가오는 세계, 같은 건 없었다.

수많은 하루를 경험할수록,

삶의 비의(秘意)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언덕에서 내려와 다른 언덕으로 갈 뿐이었다.

모든 길이 내리막길인 동시에 오르막길이어서,

길의 방향과 지대의 고저는 알 수 없었다.


기를 쓰고 벽을 넘어도 그곳에 있는 건, 이곳에 있던 것들이었다.

흔한 욕망과 더 흔한 좌절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내가 준비한 것도,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도 없었다.


'너머'는 낡아갔고, 상상은 지루해졌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어제와 비슷하다고 해서 오늘의 나의 세계가 낡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욕망과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욕망을 억눌러도 될까.

내가 지금 바라는 세속이, 늘 바랐던 것이라고 해서 그게 의미가 없을까.

그럭저럭 선방한 하루가, 실상은 꽤 제대로 보낸 하루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누구의 삶에 개입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어"라는 토로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하루의 길이가 짧아진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내뱉는 문장도 예전보다 짧아진 듯했다.

같이 잔을 들고 동시에 잔을 비우면서 난 그와 다른 생각을 했었다.

나의 하루에 좀 더 호들갑스럽개입해야겠다고.

 

직 남아있는 나의 뻔한 욕망들에 새삼 감사했다.



저 너머를 여전히 상상한다.


완전히 새로운 욕망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만 세포 몇 개라도 다르니,

매일 욕망하는 나는 새로운 나일 것이다. 그거면 됐지 싶다.


어쩔 수 없이 실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또 어떤가 싶다.

'너머'가 애매하면, '너머의 너머'를 또 욕망하면 될 테니까.

그 정도 판타지는 갖고 사는 게 정신건강엔 좋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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