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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Dec 20. 2020

「H2」 졸업하기

코가 하루까 감독 :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인생도, 연애도 이제 막 플레이볼 한 것뿐이잖아.

시합은 몇 번이고 뒤집어진다.

그리고 설령 졌다 해도 시합은 한 번만 있는 게 아니야.

이제부터 수많은 시합을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돼.

연애만이 아니야. 일, 질병, 인간관계, 싸워야 할 상대도 여러 가지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연전연승으로 죽을 때까지 웃기만 하는 그런 인생을 바라나?


미키오 : 생각했던 거보단 훨씬 괜찮은 감독이군요. 


코가 감독 : 주저하지 마. 더 칭찬해.


-만화 「H2」 소장판 6권 中




누군가가 이 만화에 대해 그랬다.

야구만화를 가장한 연애 만화,라고.


대학교 때, 컴컴한 지하 만화방에서 H2를 읽을 때가 기억난다.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난생처음 자유라는 걸 얻었지만,

그걸 어떻게 대하는지는 서툴렀던 스무 살,

나는 연애를 이 만화를 통해 배웠다.


소꿉친구인 고교 야구선수 히로와 히데오, 그리고 하루까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와,

새롭게 하루까라는 여자애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감정 변화를 따라가면서,

나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누군가를 떠올렸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누군가를 상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마주하고 그 감정에 대처하는 모습,

그러니까, 주저함과 주체 못 함, 섣부른 예의와 뒤늦은 솔직함을 오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연애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H2를 다시 보면서 연애 외의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에 등장한 수많은 조연들에 나를 대입하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심상하게 내뱉는 대사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얼핏 H2의 주인공들은

야구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단순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끝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주저하고 고심하고 결정한다.

연애라는 감정에, 친구라는 처지에, 인간관계라는 조건에 마주하여

17살, 18살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말을 하고 자신의 표정을 짓는다.


세상의 한 복판에 나가지 않은 시절,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뭔가가 확정되지도, 뭔가를 결정해야만 하지도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할 때면

나는 종종 이 만화를 1권부터 끝까지 다시 보곤 했다.

아다치 미츠루가 만든 이 익숙한 세계 속에서 난 확실한 위안을 받았다.



얼마 전, 이제 H2를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다만, 어느 휴일 오후, 이 만화책을 펼쳤는데

만화 속 주인공들이 이제 고등학생으로 보였을 뿐이다.


여전히 그들은 매력적이었지만,  

이제 내가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욕망에 대한 인정,

세상이 나를 위해 준비해둔 호의에 대한 믿음,

두근두근한 감정을 쉬크하게 숨겨도 돼, 라는 토닥토닥,

연애의 원형이라 부를 수 있는 순정에 대한 간직,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대단한 걸 숨기고 있다는 자신감.


이제 나는 그런 위안을 주는 다정한 얼굴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엔 내 얼굴도 있다.



그런 이유로,

아다치 미츠루의 신작이 나오면 졸업앨범을 가끔 뒤적이듯 웃으며 읽겠지만

일단 H2에는 안녕을 고해도 될 듯하다.


H2는 말하자면,

보조바퀴를 뗀 자전거를 처음 타는 나를 잡아준 누군가 같은 만화였다.

극 중의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준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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