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난로를 꺼내며

by 너무 다른 역할

셋이서 그냥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부엌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식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윤곽이 모호한 편안함이 우리를 감쌌다.


-소설「유리고코로」中, 누마타 마호카루





여름이 갔다는 사실을 늘 뒤늦게 인정하게 된다.


아침 바람이 선선함을 넘어 쌀쌀해질 즈음에도,

가을의 기척에 신경 쓰느라 여름의 종료는 유보된다.

매년 그렇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계절의 중간에 서 있다가, 환절기 재채기가 잦아지면

집안의 여름 것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


지난 주말엔 수북한 여름옷을 정리했다.

빨 것들을 빨고 나머지는 무너지지 않게 정리해 벽장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예비해둔 기력이 다 해, 긴팔 옷들은 당장 쓸 몇 장만 꺼내고 말았다.


당연히, 여름 뒤 한 달 남짓의 먼지가 내려앉은 선풍기는 나중에 정리하기로 했다.

이유는 많았다. 어디 가지 않으니까.

선풍기 몇 대 있다고 집안이 복작거리지는 않으니까.

굳이 여름을 빨리 지울 필요는 없으니까 등등.



오늘 아침, 썰렁한 날씨에 코가 간질거리는 걸 느끼면서,

여름이 남김없이 가버린 걸 알았다.


문득 난로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은 의욕이 생겼을 때 몸을 움직여야 한다. 혼자 살면 더더욱이. 잠옷 위에 셔츠를 걸치고 마스크까지 쓰고 나서 베란다 문을 연다.


스스로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속도로, 몇 해 동안 반복된 일을 한다. 전기난로를 꺼내오고 선풍기들을 베란다로 밀어 넣었다. 내년 5월 전까지는 그 상태 그대로 있을 것이다.



작은 난로는 퇴직 전 엄마의 책상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대수롭지 않게 이 얘기를 하던 엄마는,

'쓸려면 가져다 써라. 난 이제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그 옆의 큰 난로는 그보다 몇 년 전에 가져왔다.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일상이 비슷한 곡선을 그렸기에,

먼저 퇴직한 아빠도 같은 말을 했었다. 이제 필요 없다고.



그런 이유로, 난로의 불빛을 쬐고 있으면,

엄마, 아빠의 예전 일상을 반복해 사는 기분이 든다.

두 분의 별일 없던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뒤늦게나마 알게 된 듯도 하다.


아들인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별개로,

그와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각자의 공간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지금보다 젊고 지금보다 바빴던 두 사람의,

충만한 시절을 함께 한 난로들은 아직도 건재하고 여전히 따뜻하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고 색이 바랜 플라스틱 몸체를 구석구석 닦는다.

오랜 시간만큼 난로는 유용했고, 그 효용성으로 우리는 안온할 수 있었다.

올 겨울도, 엄마 아빠에게서 따뜻함을 빌려 쓰듯 난로를 켤 것이다.


조심히, 아껴가며 쓸 생각은 없다.


부모님이 관통해 온 세월을, 경계선이 선명한 과거로 치워두지 않는 것처럼,

난로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면서 막 쓰는 게,

'윤곽이 모호한 편안함'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앞선 누군가의 세월과 뒤이은 누군가의 세월이

하나의 온도로 이어질 수 있다면,

낡은 난로로서도 꽤 만족스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