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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에 삽니다
겨울, 화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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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역할
Oct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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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치 끊임없이 길게 이어지는 논쟁으로 절망에 빠져 버린 어떤 사람이,
전혀 동요 없이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떠오르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소설 「여자를 안다는 것」 중, 아모스 오즈
화분을 안으로 들인다.
볕이 좋은 어느 날의 오후를 제외하고, 한 계절 동안 화분들은 집 안에 있을 것이다.
매년, 무슨 화분을 어디에 두는지 달라진다.
지난겨울엔 하나는 거실 책장 위, 하나는 부엌 책장 위였나.
깊이 생각해서 배치하진 않는다. 작년 겨울까지 화분은 고작 두 개였다.
그 오래된 화분 중 하나는 산세베리아다.
15년 전 지금과 다른 직장을 다닐 때, 회사 앞으로 찾아왔던 친구의 손에 주먹만 한 미니 화분과 주먹의 반만 한 산세베리아가
들려있었다.
"물만 가끔 주면 된대요."
라고 웃던 그녀는
내가 15년 동안이나 물 주는 걸 잊지 않을 줄 몰랐을 것이다.
두어 번의 위기를 버텨낸 산세베리아의 잎은 두껍고 뻣뻣하다.
마치 아침에, 잊지 않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의 내 얼굴처럼.
두어 달 전, 옆 자리 선배가 조그만 화분 모둠 세트를 받았다며 하나 고르라고 했다.
다양한 종류의 화분이 있었다. 대부분 이름을 모르는 것들이었다.
아무거나 달라는 내 말에 선배는 고민도 하지 않고 하나를 건넸다.
집에 와서 잎의 모양을 보고 검색하니 아이비라는 식물이었다.
몇 년 전 바질을 키웠던 플라스틱 화분이 비어있어서 옮겨 심었다.
새로 왔다고 딱히 신경을 써주지도 물을 더 주지도 않았는데, 아이비는 알아서 컸다.
덩굴식물인가 싶어서 화분 옆에 지지대를 세워보았는데,
줄기의 끝은 계속 지지대를 벗어났다.
덩굴이라고 늘 감지는 않는다는 걸
, 감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이비를 보고 알았다.
회사에 큰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성실한 척했지만 동요했다.
아이비와 달리, "지지대 따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동요였다.
소란에서 벗어나 집에 와서 화분에 물을 준다.
녹색은 녹색이라는 이유로 설익은 말들을 흡수하고,
잎은 잎이라는 이유로 어지러운 시선을 잡아준다.
마른 흙이 물을 머금고 검어진다.
곧 잎의 끝까지 물이 올라가면 아이비는,
잠시 말라있던 시간 따위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몇 달 전 충동구매했던 올리브는 천천히 크는 중이다.
금방 클 줄 알고 중간 크기의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생각보다는 신중하
게 크는 타입이다. 줄기도 쉬이 굵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잔가지들을 정리했는데,
너무 과감하게 잘라내서 올리브가 기분이 상했는지
그 이후로 새 잎을 내지 않기로 다짐한 듯한 느낌도 든다.
아직 잎을 떨어뜨리지는 않아서 지켜보는 중이다.
그래도 잘 버틴다 싶다.
이걸, 버틴다,라고 표현하는 거 보면
나도 잘 버틴다 싶다.
만리향은 부엌에 둔다.
작년에 거실 액자 옆이었는데, 올해는 부엌의 책장 위로 자리를 정했다.
좋은 화분으로 바꾼다 바꾼다 생각한 지도 몇 년째다.
하지만 내 게으름으로 만리향은 10년 전 처음 사 올 때의 플라스틱 화분에 있다.
더 큰 화분으로 옮겨주면 가지는 어디로 뻗어갈까.
어쩌면 더 뻗지 않을 수 있겠다 싶다.
예상치 못했던 넓은 화분 속에서 뿌리는,
이미 뻗어있는 가지와 잎에 더 신경 쓸지도 모른다.
긴 세월 같은 흙 속에 있던 만리향에겐,
새로 잎을 틔울 때의 어수선함은 내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다음 봄 새 화분으로 갈아주면 만리향은 알아서 제 길을 찾겠지 싶다.
그때까지는, 그러니까 올 겨울이 지날 때까지는
별다른 동요 없이 자기의 녹색을 유지할 것이다.
부엌에 갈 때마다, 빨래를 하고 요리를 할 때마다,
오래 받아온 내 시선을 다 안다는 듯이 토닥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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