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Nov 12. 2020

가서 시켜놓을게요 추어탕


명동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명동성당 계단 앞을 지나는데 누군가의 전화통화 소리가 들렸다.


"가서 시켜놓을게요, 추어탕."


왠지 나까지 점심 메뉴를 추어탕으로 바꾸고 싶게 하는 신난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50대로 보이는 수녀님이었다.

성직자 특유의 온화함이 보이는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보는 사람마저 웃게 만드는 화사함이 보였다.

그건, 추어탕 때문일 수도,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두 명과 곧 합류할 일행 때문일 수도 있다.


성당 앞의 알록달록한 낙엽 사이에서 그녀는 꽤 들떠 보였다.



돌아서서 걷다 보니 문득 내가,

수녀님도 추어탕을 먹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굳이 가을이 아니어도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난 그걸 신기해했을까.

내가 느낀 생경함은 아마도,  

그녀가 성직자가 된 후 내내 받고 있을 '악의 없는 경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교구의 신도라면 개인적으로 가까워져서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평범한 일상을 보기보다는

사제로서의 경건함을 찾았을 것이다.


사제복의 강한 이미지가 모든 걸 상쇄해서,

생활인으로서의 그녀는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간과한 시간 동안 수녀님이 차곡차곡 살았을

평범한 일상을 혼자 상상하며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아마도 그녀는,

누군가가 추천한 맛집을 찾아가고,

가을이면 단풍의 색이 진해지는 걸 즐기고

늦잠도 자고, 밤에 양치하기 싫어서 미적대기도 하고,

누구에게 삐지거나 누군가에 대해 수군대기도 하고,

외워지지 않는 고루한 표현을 바꾸고 싶어 하거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 낯선 문장에 감탄할 것이다.


이 은밀할 것 없는 일상을, 사람들이 은밀하게 만든다는 걸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굳이 말을 보태기보다는

추어탕 집으로 오라고 말할 때의 즐거운 표정으로 대신하지 않을까.

그녀와 한 마디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왠지 짧게 수다를 떤 기분이었다.


볕이 좋은 가을 점심,

저마다의 들뜸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걸어 약속 장소로 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들 외롭고 시간이 많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