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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21. 2021

'사람이란' 이건 너무 야심 찬 주어이고

"'사람이란' 이건 너무 야심 찬 주어니까, 주어는 그냥 '나는'으로 하고요."


얼마 전 술자리에서 후배가 말했다.

진지함과 가벼움이 무시로 교차하는 술자리 대화였기에,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주어가 '강등'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그의 연애(혹은 결혼)와 관련된 어느 부분이었던 듯하다.


연애 이야기라면 주어가 '나'이건, '사람'이건 별 상관은 없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지만,

굳이 주어를 정정한 그의 심중을 짐작했기에 술자리에선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모든 사람의 연애가 비슷한 궤적을 그리겠지만, 여전히 모든 연애는 각자의 연애이니까.



메모해 둔 이 말을 며칠이 지난 후에 생각해본다.


혹시 우리는 '사람이란'으로 시작하는 말을

어려서부터 지겹게 들어와서 자동적으로 거부하는 건 아닐까?


동시에 '사람'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너무 부풀려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늘 흔들리고 작아보이는 '나'와 다르게, '사람'은 뭔가 견고하고 현명할 것 같은 무엇처럼 보인다.

수많은 경험들이 축적된, 그러므로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을 가진 집단으로서의 '사람',

나라는 개인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딘가  오류일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하는.


하지만, 사회생활을 해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거대해 보이는 '사람'이라는 벽 뒤에는 수많은 개인이 있을 뿐이다.


다양한 위치에 있는, 수많은 '나'의 야심들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합리, 예측, 이해 등등의 단어가 무색해질 만큼의 아집이 가득하고

판단은, 축적된 집단 경험보다 개인의 취향에 기대어 이루어지기 부지기수이다.



야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오히려 '나'보다는 '사람이란'을 주어로 많이 쓴다.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원래 이러니까......"

"사람들은 이쪽으로 가게 돼 있어. 넌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대충 수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욕심이 과도하게 분출되는 상황을 마주 하면 한숨이 나온다.


물론, '사람'을 앞세우고 '자신의 일'을 도모하는 게,

언제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는 깃발을 들고 맨 앞으로 나선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자산을 동원해 일을 진척시켜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선, 사람을 주어로 내세우는 건 설득의 기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설득이 되건 안 되건 일이 흘러가는 방향은 비슷하다.

설득이 안 될 경우에 윗사람의 직위가 맨 앞자리로 튀어나오곤 하니까.)



그럼에도, 누군가의 야심을 마냥 용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욕심을 가지고 있고,

특정 개인의 욕심만 채우기엔, 한 조직이 갖고 있는 자원은 늘 한정적이다.


파워 게임이 없는 곳은 없겠지만,

일방적이기만 한 파워 게임으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고

다수의 불만이 쌓일수록 야심을 드러낸 소수에게도 불리하다.


소수는 혼자 일할 수 없고, 다수는 꽤 감정적이다.



욕심들이 충돌하거나,

누군가의 욕심과 반발이 부딪치는 일이 주변에서 종종 벌어진다.


솔직히 갈등 회피 형 성향을 가진 나로서는, 내 욕심을 뒤로 물리기 일쑤였다.

후일을 기대할 만한 여지를 조금 보장받는 식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마냥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싶은 생각이 요즘 든다.

좋게 좋게, 가다가, 결국 상황이 나쁘게 나쁘게, 되고

정작 처음 잘못 방향을 잡은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는 걸 여러 번 목격한 결과 드는 생각이다.



후순위로 두던 내 욕심을 억지로라도 앞으로 가져와야지 싶다.


100%의 합리와 공정을 기대할 순 없지만,

진부한 야심 사이에 어느 균열이 있을 수는 있으니까.

작은 틈으로 스미듯이 들어가도 입장(入場)은 입장이니까.  


대신, '사람이란'이란 주어보다는 '나'라는 주어를 사용할 생각이다.

그래야, 내 욕심에 대한 비판이 더 쉬울 테니까.

비판이 눈에 잘 들어와야 내 욕심이 빛이 바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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