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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17. 2021

잔량을 가늠하듯 서 있었다

자 여기 결재판.

네? 갑자기 이걸 저한테 왜......

아, 이 결재판 이제 니 자리에 두고 관리하라고. 주말 것까지 모아서 월요일마다 한꺼번에 결재 올리면 돼.

네. 근데 오늘 쓴 거는......

아니다, 잠깐만. 오늘 거까지는 내가 사인해야 하는구나. 줘 봐.


평소 그의 스타일과는 달랐다. 내내 어수선했다.

뜬금없이 지시를 던졌고, 맥락이 한두 군데 빠진 지시내용은 허술해 보다.


이런 느낌은, 전날 사무실에서 발생한 '코로나 확진자 사태'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음성 판정 전까지는 출근하지 말라고 한 방침에 따라, 나나 그나 점심이 지나서 출근을 했고

이후에도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거기에 가뜩이나 차가운 날씨도 겹쳐,

오늘 사무실은 한가함을 넘어 쓸쓸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이 사무실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도 온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정 문제로 불가피하게 사무실을 떠나겠노라 선언한 그를 만류할 논리없었다.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은, 사무실을 기반으로 하는 평범한 일상이 감당하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기에,

퇴사라는 결론은 지극히 합당했고, 다른 누군가가 억지를 쓸 여지는 없었다.

그는 설 연휴가 끝난 월요일에 바로 행정 절차를 시작했고, 이틀 뒤인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었다.


사람들마저 비어 있어 눈에 거칠 게 없는 풍경의 사무실에서,

그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정리했다.


일을 할 때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닌 그는, 마지막 날에도 차분했다.

별다른 소음이나 특별한 주저함 없이,

공문과 결재서류, 보고서로 가득했던 책상이 비워졌고

늘 조금 삐딱한 각도였던 개인 사물함은 어느새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그러던 어느 즈음이었던 듯하다.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본 건.

그는 하나의 동작을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 스위치를 끈 것 같은 모습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자리로 돌아오다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복도에 내가 멈춰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지금 기억하는 시간보다 훨씬 짧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순간은, 그가 하나의 정물이 되기엔 충분했다.


그는 말하자면, 자신의 잔량을 가늠하듯 서 있었다.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는 그의 시선은,

책상 위와 사무실의 원경 중간 어디 즈음에 있는 듯했지만,

실상 거기에는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가 보고 있던 건, 자신이 그 자리에 떨어뜨린 자신의 조각이거나

혹은 켜켜한 날들이 남겨놓은, 자신의 시간과 닮은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마모나 마찰과는 거리가 먼 표정을 지은 채,

그는 자신이 자리를 떠난 후 남게 될 무언가를 가늠하고 있었다.

훗날 그걸 세월이라 부를 수도 있고, 시절이라 칭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그러니까 뭔가를 보다가 우두커니 멈춰 선 짧은 순간, 그는 어떤 명명도 하지 못할 정도로 흐릿한 모습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움직였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의 이런저런 폴더들을 열고 파일들을 지웠고

누군가를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마치 이런 마지막이 익숙하다는 투였지만,

그의 간명한 움직임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외의 날들이 잦은 요즘임에도,

하나의 구체적인 예외를 감당하는 건 늘 낯설다.

그건, 자신을 남겨두고 가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옆자리를 계속해서 지킬 누군가에게똑같다.

똑같이,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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