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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5. 2021

하루하루 허물어지는 세상을 세우는 남자

영화 「더 파더」

그는 그저 살아있기에 그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뿐이었다.

늘 그렇지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종말이 꼭 와야 하는 순간보다 1분이라도 더 일찍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소설 '에브리맨' 中, 필립 로스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던의 한 아파트, 아버지 안소니는 기억을 잃고 있다.


그는 간병인에게 험한 말을 해서 그만두게 한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둘째 딸의 안부를 묻는다.

자신이 지금 있는 아파트가 딸 앤의 아파트임을 알지 못하고,

앤과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사위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그런 그에게 딸의 말은 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조금 전에 들고 온 치킨을 사 온 적이 없다고 하는지,

왜 수십 년 동안 벽에 걸려있던 그림을 본 적 없다고 하는지,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파리에 간다던 딸은 왜 갑자기 '파리 얘기는 한 적도 없다'라고 하는지.



남아있는 유일한 가족인 딸 앤은 아버지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직장에 다니며 아버지까지 돌봐야 하지만,

아버지는 벌써 몇 명째 간병인을 갈아치우면서도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한다.

이혼한 지 오래된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파리로 가서 정착하려 하지만,

혼자 남게 되는 아버지 때문에 고민이다.



영화는 아버지 안소니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눈을 뜨는 매일매일, 문을 여닫는 매 순간, 안소니는 헝클어진 시간 속으로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현재의 기준으로 딸에게 말을 걸지만, 딸은 다른 시간 속에 있다.

자연히 둘 사이 질문과 대답만 반복된다.


아버지는 딸의 머리 모양이 바뀐 걸 알아보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지만,

오래전부터 같은 머리를 하고 있던 딸은 답답하다.

딸은 저녁을 차리며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아버지의 관심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머물러있다.


관객은 안소니가 보는 그대로 영화의 장면들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어리둥절해 한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실제 일어난 사건이 시간순으로 이해가 된 후에는,

안소니를 관찰하는 입장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영화는, 안소니의 혼돈스러운 얼굴을 길고 느리게 관객들에게 내어놓는다.


영화적으로 친절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처절하다.



처음에 관객은,

안소니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하는 데에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딸이 결혼을 했었는지, 왜 낯선 남자가 불쑥 집에 들어와 자신의 사위라고 하는지, 왜 면접 때 즐겁게 대화를 나눈 간병인 대신 다른 여자가 다음날 반갑게 인사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조각으로만 남은 자신의 세계를 기준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 몸에 밴 젠틀함과는 별개로, 질문을 할 때 안소니의 얼굴은 절박하다.


하지만, 안소니에 대한 더 큰 연민은, 그가 질문을 하지 않을 때에 온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묻다가 상대의 다그침을 감지한 어느 순간 멈춘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 그랬지.'라고 대답한다.


이해했음을 가장한 안소니의 얼굴에 떠 있는 쓸쓸한 미소를 보며, 우리는 치매라는 병의 무서움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을 오롯이 혼감당해야 하는 개인의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아버지 안소니는 딸의 대답에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화를 내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질문을 아예 멈추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지금'에 대해, 자신이 있는 '이곳'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헝클어진 상황을 서서히 이해하게 되는 건 관객뿐이다.

그는 수년간의 시공간이 펼쳐진 곳에서 길을 잃은 채 외롭게 분투할 뿐이다.

그의 혼란은 해소되지 않고, 질문으로만 이어지는 그 싸움으로 그는 지쳐간다.


모든 것이 섞인 곳에서 그가 쉴 곳다.


그에게, 자신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매일 낯설다.

딸도 사위도 간병인도 그가 기억하는 얼굴이 아닌 경우가 이어진다.

매일 바뀌는 얼굴을 겨우 인정하고 말을 건넸을 때,

그에게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이 돌아올 뿐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30년 전에 산 아파트, 그래서 방도 부엌도 익숙하기 그지없는 그곳을, 딸은 자신의 아파트라고 말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간병인을 쫓아낸 후에 어쩔 수 없이 잠시 모시게 됐다고 설명하지만 안소니는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뒤섞인 일상 속에서,

안소니는 안절부절못한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세상을 짓고 부수기를, 그 세상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한다.

안소니는 편히 밥을 먹을 수도, 편히 잘 수도 없다.

헤드폰으로 오페라를 들으며 잠시 숨을 돌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의 현재는, 그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느냐에 따라 바뀐다.


안소니는  계속해서 딸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들으면서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 이해한다.  

덕분에 주위의 인물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고, 시간 순서가 무시될지언정 안소니는 자신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가 절박하게 매 순간 현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면,

그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은  당연히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 기억과 관계란 오롯이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은 만큼만, 보고 싶은 대로만,

그의 세상은 만들어지고 허물어진다.



마지막 장면, 영화는 드디어 아파트를 벗어난다.

안소니는 요양원에서 깨어난다.


그가 사위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 남자와,

개인 간병인으로  면접을 본 여자가 간호사로 등장한다.

어리둥절한 그는 방 문을 열지만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다.

침대에 주저앉은 그에게 간호사가 와서 상황을 설명한다.


딸 앤은 몇 달 전 남자 친구와 파리로 떠났고 그는 요양원으로 왔다.

딸은 자주 엽서를 보내고 몇 주에 한 번씩 주말에 찾아온다.


안소니는 이제까지 오던 대로 간호사의 설명을 받아들여 현실을 만들려 하지만, 이제 불가능하다.


그가 어젯밤까지 잠자리에 들었던, 30년을 살아온 그의 아파트는 이제 사라졌고,

자신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딸은 다른 나라에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는 수십 년 전 '엄마'의 기억을 현재진행형으로 꺼낸다.


하지만, 간호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는 안소니의 표정을 보면서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완전히 절망하지 않기 위해,

엄마라는 새로운 도피처를 끌고 왔지만,

자신도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뒤섞인 수십 년 동안의 기억을 완전히 떠나와

요양원의 조용한 방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는 내내 조바심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이 영화는, 노쇠함을 그리는 보통의 영화들과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지난 삶에 대한 반추 대신, 현재의 비참함을 전면에 내세우고,

남은 시간에 대한 관조적 태도 대신, 집착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영화는 절망적이지 않다.


순간순간 무너지고 당황스러워하지만 안소니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현재에 어떻게든 머물려고 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 그를 지지하게 된다.



"제대로 옷을 입어야 해."


영화의 중간, 전날 면접 본 간병인이 도착했다는 딸의 말에 그는 파자마를 입고 아침을 먹다가 이렇게 말하고 방으로 간다.


그가 어떻게든 셔츠에 스웨터를 단정히 입으려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거실에 어울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럼으로써 자기가 버리지 않은 스스로의 과거에 맞는 자신을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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